조문영 ‘연루됨’을 읽고
"Give a Man a Fish"
조문영 교수의 책 「연루됨」에서 처음 만난 이 문구는,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라”는 유명한 격언이, 때로는 빈민의 절박한 현실 앞에선 무책임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물고기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연루되고, 개입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논지였다.「연루됨」은 대중서면서, 곳곳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시선이 좋았다. 작가는 한국과 중국의 '타자'인 빈민, 노동자, 청년,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찾아다니며 ‘함께 살아가는 길’을 묻는다. ‘연루됨’이란, 방관을 넘어선 손내밈이다. 책임이라는 의무가 아니라, 같이 살아가려는 태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연결된 사회"는 가능한가?
그 질문을 여전히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내 안의 오래된 불편함을 조용히 달래 주었다. 이 책이 말하는 '타자'는 경제적 약자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들, 우리가 경계 밖으로 밀어 놓았던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 있다.
얼마 전 드라마로 만들어진 <파칭코>는 재일 한국인의 삶을 다시 조명했다. 영화 <GO>,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 재일로 태어나 일본 사회의 주류가 된 강상준 교수의 책들 또한, 나에게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창이었다. 일본과 한국, 한국과 북한, 주류와 비주류, 한국인과 재일한국인...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수많은 경계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국적과 언어, 기억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삶. 그야말로 경계인의 삶이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서툰 한국어로 조국을 말하는 사람들,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나는 이국의 땅에 뿌리내린 미나리 같은 생명력을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들이 한국인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은, 애초에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들은 경계 위에서 자라는 강인한 생명이며, 그들의 언어와 몸짓 자체가 존재의 증거다.
나는 사회적인 의미에서 경계인이라 할 수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 인서울 대학을 나왔고, 대기업에 다닌다. 다만 그 껍질 안에서 조용히 불편함을 느끼며, 비주류처럼 살아왔을 뿐이다. 빈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노동해방을 외치던 선배들이 한때는 우스워 보였고, 주류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삶을 갈아 넣던 직장 동료들이 안쓰러웠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만난 빈민과 청년들, 그리고 국경과 민족 사이에 서 있는 이들의 삶은 내게 '경계'의 실존을 조금 더 선명히 보여주었다.
10여 년 전, 교토 여행 중에 미쓰비시 강제 징용 노동자들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우토로 마을’을 찾았다. 당시 마을은 미쓰비시와의 법적 분쟁에서 패해 강제 이주가 결정된 상태였다. 토지를 사들이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평일이라 마을은 한산했다. 마을센터에서 할머니 몇 분이 봉사자와 함께 김치부침개를 부치고 계셨다. 말이 잘 통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끝내 그 부침개를 대접받았다. 돌아서기 전, 준비해 간 돈봉투를 조심스레 내밀자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잊지 말아 달라, 다음에 꼭 다시 와달라."는 말과 함께. 그들은 경계인이자, 동시에 경계인이 아니었다. 나와의 사이에 어떠한 선도 긋지 않고 맞이해 주었고, 당면한 사태 해결을 위해 한일 양국의 이해를 바랐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마을을 나서며 길가에 세워진 푯말과 노랫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
그 문장은 단순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선언처럼 느껴졌다.
경계에서 자라난 몸짓과 언어는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질문들을 조용히 되묻는다. 누가 중심이고, 누가 주변인가.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침묵해야 하는가. 그들의 존재를 다르게 보는 순간, 우리 사이를 가르던 선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경계는 타인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선택한 자리, 내가 외면한 현실, 그 모든 곳에도 경계는 있었다. 경계 너머의 삶을 더는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연루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