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날들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

by 김정민

지브리 애니 <붉은 돼지>의 OST, 히사이시 조의 ‘돌아오지 않는 날들(帰らざる日々)’은 내 삶을 관통하는 슬픔의 테마이다. 트럼펫의 애수 어린 음색으로 시작하는 재즈 풍의 이 연주곡은 애니 전반에서 향수의 분위기를 잡아준다. '붉은 돼지'는 스스로 돼지가 되어 파시즘과 전쟁이 잠식하는 인간 세상을 등져버린 남자의 이야기. 아드리아해 위, 붉은색의 비행기를 모는 장면에 이 곡이 흐르면 경험한 적도 없는 그 시절 그곳을 누구나 그리워하게 된다.


몇 년 전, 믿고 의지하던 선배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부서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열댓 명을 관리하는 파트장이 되었다. 그때 난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다. 사람을 관리하는 것부터 적성에 맞지 않았는데다, 가뜩이나 경쟁적이고 치열한 조직 내에서 나 혼자도 아닌 누군가를 책임지고 이끌어간다는 건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퇴사를 생각했고, 선배들의 등 뒤에서 맘 편히 내 일에만 열중하면 되었던 '돌아오지 않는 날들'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아직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때, 나 역시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퇴장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옆자리 후배에게 내가 그만두면 그 곡을 피아노로 연주해 달라고 무리한 부탁을 하기도 했다.


나는 늘 새로운 환경을 만나면 남들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 공간의 사람들과 애착을 쌓고, 그곳에 영원히 머물 수 있기를 바라곤 했다. 물론 그것은 '일방적인 희망'에 불과했다. 내 주위의 환경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만있지 않고 변했고, 관계도 흩어졌다. 그때마다 나에겐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이 찾아왔다. 군 입대를 앞둔 동아리 환송회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 자리에서 사라진다’는 실감을 했다. 그 누구보다 매일 보고 울고 웃으며 교감을 나누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 감정에 너무 벅차 눈물까지 흘리기도 했다. 길지 않았던 연애들이 끝났을 때도 회복에는 수년이 걸렸다. 그 사람을 잃어서도 힘들었지만, 그 사람과 함께했던 내 시간을 잃은 듯했기 때문이다. 내 세계가 무너져버린 느낌이었다.


난 자그만 상처도 들추고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다. 과거의 감각도, 현재의 감각도 아프도록 생생해서 쉬이 떠나지 않는다. 당시에는 내가 왜 그렇게 방황했고, 무엇을 갈망했는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런 나를 이해하게 된 건 참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내가 바랐던 것은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던 안정된 세계였다. 되돌아보니 나는 늘 ‘정주하고 싶은 공간’을 원했던 것 같다. 단순히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가 스며들고 시간이 쌓이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에게 조금은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주는 관계를 꿈꿨다.


그래서 서툴지만 천천히 후배들과 함께 그 세계를 다시 빚어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간절하게. 나 혼자 앞에서 버텨야 한다는 마음을 덜어내고 후배들을 믿고 차근차근 일을 맡기며 하루하루를 쌓아갔다. 불완전한 나의 언어와 서툰 손길로 무언가를 세워 나가는 일이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게 닿았다. 몇 년이 지나고 보니, 그렇게 만들어낸 관계와 공간은 결국 또다시 나를 지탱하는 세계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서, 되레 내가 위로 받고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 시간들이, 그 얼굴들이, 그 대화들이 모여 내 안에 또 하나의 세계를 단단히 세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날들(帰らざる日々)’을 아무리 들어도 ‘찬란했던 그날’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붙잡으려 애써도, 애틋한 그 시간의 공기와 웃음, 설렘과 떨림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듯 사라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리에, 견뎌온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또 다른 세계가 만들어졌다. 돌아오지 않을 그날을 대신해, 나는 오늘을 살아간다. 그 세계는 여전히 완벽하진 않지만, 그 안에서 이어진 관계와 쌓인 기억들은 나를 버티게 하고, 내일을 기다리게 한다. 결국 살아간다는 건, 다시 오지 않을 하루들을 하나씩 통과하며 새로운 나의 세계를 세워가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