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이선 씨(1932년 생) 4.3 증언 인터뷰
소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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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난 경 해연 오라방이 죽언 마씸
( 그러니까 그렇게 오빠가 돌아가셨어요)
아이고 경 되어시냐 ? 느 신디 그런 오라방이 이신 줄 당추 몰랐져( 그런 일이 있었구나, 너에게 그런 오빠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네)
이런 말 30년 넘은 살 같은 친구 신디도 못 골아봤수다 (이런 사정 30년 지기 친구에게도 못 얘기해봤어요)
가이도 속속 느도 속솜해져실테주게( 그 친구나 너나 그저 조심하느라 조용조용 살았겠지)
자유당 시절에는 투표권이 안 나옵디다 게, (이승만 정권 때는 투표권이 안 나와서 마음 졸였어요)
투표권 줘 봐야 야당 찍을 집이엔 빼버려실테주게( 집권당 찍지 않을 집이라고 투표용지도 안 줬겠지)
경해도 산 목숨은 살아지는거라예?( 그래도 산 목숨은 살게 되는 거네요)
설운 조캐야, 살암시믄 살아진다 (가엾고 불쌍한 아이야, 참고 살고 있으면 다 살게 되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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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김이선 씨(1932년 생)는 4.3 때 오빠의 활동으로 부모님이 대신 돌아가셨는데 이를 '대살'이라고 한다. 그 사연을 필자가 처음 들은 것은 35년 전이다. 그 내용은 제주 4.3 연구소에서 증언 채록한 <이제사 말햄수다 1>(한울출판사, 1989) 두 번째 이야기에 수록되었다. 이 글은 그로부터 30년 후(2018년)에 다시 인터뷰한 내용이다. 35년 만에 다시 만난 곳은 제주도 한마음병원이었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는 않아서 따님의 도움을 받으며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김이선 씨는 여성 구술자로는 드물게 4.3 당시 상황을 개인사에 함몰되지 않고 파악하는 분이다. 그 중심에는 오빠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빠가 했던 일이 그른 일일 리 없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오빠가 북으로 간 것도 남에 있으면 목숨 보장이 어려우니 살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는 듯했다.
15살에 4.3을 겪었다고 하셨는데 당시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시는지요?
제주에서 우리 조천리는 왜정시대 때부터 유명하지 않습니까, 일본 놈들이 ‘아다마 좃덴(머리는 조천)’하듯 독립운동하던 사람이 득실득실 많았습니다. 해방이 되니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학교 세우고 면장이 되고 마을 전체가 기운이 펄펄 났습니다. 우리 오빠는 해방되자마자 활동**을 했지요.
1947년 3.1 대회 때 우리 동네 사람들은 어두울 때 새벽밥 해 먹고 짚신 동여매고 3.1 대회가 열리는 제주시에 있는 북초등학교까지 갔습니다. 14km 거리를 뛰면서 갔지요. 작은오빠는 연설을 그렇게 잘했다고 합니다. 저는 직접 들은 일이 없지만 오빠가 공회당 같은 데서 연설을 시작하면 졸던 사람도 깼다고 하더군요. 동네 올레 밖에만 나가도 ‘누구 누이동생’이라고 나를 대접해줬지요. 그러니까 작은오빠는 일찍 주목을 받았어요. 아마 만세운동(*47년 3.1 대회) 후 집에 들어와 보질 못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은 오빠 때문인 가요?
무자년(1948년) 가을걷이가 끝날 때쯤 작은오빠를 찾아내라고 어머니 아버지를 끌고 갔습니다.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아들 하나 숨겼다고 온 가족이 잡혀 가던 때였으니까요. 아들 형제를 다 감췄으니까 우리 부모님은 양심적으로 자진해서 수용소로 들어갔어요. 조천 수용소에는 마을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아버지는 음력 48년 12월 6일에 수용소 1번으로 학살되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은 눈이 팡팡 오는 날 밤이었어요. 장례식도 못 치르고 집에 있던 우리들이 첫 삭제(*사후 1년 동안 초하루, 보름 아침에 지내는 제사)를 지낼 때 수용소에 갇힌 어머니가 감시원을 대동해서 나왔습니다.
"나도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 너희들은 뭐 팔아먹을 것이 있으면 팔아서 맛있는 것이라도 사 먹어라. 어느 날 지서에서 오라고 해서 죽어질지 모르니까, 헌 옷 입지 말고 고운 옷, 깨끗한 옷 입고 다니다가 오라고 하면 가거라. 다행히 너희들이 살아지면 나중에 이 억울한 상황을 소도리(뒷 말)라도 할 텐데..."
눈이 온 천지를 덮은 날이었지요. 삭제 마치고 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감시원을 따라 수용소로 들어간 어머니도 며칠 후(1.12일)에 수용소 사람들과 같이 학살되었습니다.
작은오빠는 그때 제주시에 있는 고모할망(할머니)집 바깥채에 숨어있었습니다.
부모 죽었다는 기별 듣고 밤에 와 어머니 묻어두고 그 밤에 걸어서 제주시로 가서는 다시 낮에는 고향 조천 마을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주시에 숨어 사는 오빠 만나러 가서 ‘나 이젠 집에 가쿠다(갈게요)’하면 오빠도 울고 나도 울고 하면서 헤어졌는데 어느 날 부모 죽은 고향에 더 있기 싫다고 제주를 떠났습니다. 인천 삼촌집 공장에서 일하며 지내던 중 뒷 해에 6.25가 나니 행방불명이 되어 사망신고도 못하고 지냈습니다.
큰오빠는 대동청년단장***을 하며 마을 치안에 협조했지요. 6.25가 나기 며칠 전이었어요. 밭에서 돌아와서 식구들과 저녁을 먹는 데 조천지서에서 사람이 왔어요. 무슨 용건이냐고 묻는 큰오빠에게 "잠깐이면 됩니다" 해서 우린 오빠가 다녀오면 저녁을 같이 먹으려 했는데 ‘너희들 먼저 먹고 있으면 금방 다녀 오마’고 목에 걸었던 수건을 마루에 툭 던지고 나가셨지요.
그 후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수소문하니 제주경찰서로 넘어갔다는 겁니다. 나는 관덕정 옆에 있는 경찰서로 밥을 해서 날랐습니다. 오빠는 만나지 못해 간수에게 전해달라고만 했고 빈 그릇이 나오면 가져오고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오빠 갈아입을 옷을 가져가니까 담당 경찰관이 딱한 표정으로 말하는 겁니다.
‘밥은 다른 사람이라도 주면 되는데 옷은 줄 수도 없고....’하면서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밤에 경찰서 앞에 차를 딱 세워서 ‘석방시킨다’고 하니 모두 뛰어나와 허겁지겁 쓰리쿼터에 올라탔는데, 그 사람들을 부두에서 배로 2-3시간 바다 깊숙이 들어가 돌로 매달로 빠뜨려 죽였다는 겁니다. (한국전쟁이 나자) 예비검속으로 잡아갔다가 육지 사정이 다급해져 가니 누군가 명령을 했겠지요. 그 경찰관이 고마웠습니다. 그 사람은 서북청년단으로 들어와 조천리 여자하고 결혼한 사람이었어요. 후에 바다에 옷 짓고 가서 큰오빠 혼 불러다 가까운 신작로에 산 터 잡아서 비석도 세웠습니다. 헛묘(*시신이 없는 묘)지요.
그때 지서 심부름 다니던 이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더군요. 싱싱하고 똑똑한 젊은이들이 다 죽고 나니 그때는 사람 축에도 못 낀 사람들이 나중에 국회의원도 되고 일제 때 최고의 밀정이라고 소문났던 사람이 유지며 사업가가 되는 걸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 작은 오빠를 다시 만나게 된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생사를 모르던 오빠가 혹시 북에 가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했습니다. 2007년 여름, 살아있다는 소식이 오고 그쪽에서도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꿈인가 하던 중 전화통화도 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 7월 4일, 상봉일이 정해지면서 우리는 사전에 약속했습니다. 절대 울지 말기. 울다 보면 그 짧은 시간이 다 지날 것 아닙니까. 필요한 것을 물었더니 시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만나기까지 물건을 차곡차곡 모았습니다. 뺏기지 않을 것으로, 생필품 중심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이웃사람들에게 나눠줄 분량까지 계산해서 숫자를 늘렸습니다. 치약도 사과박스로 하나, 비누도 한 박스, 학용품, 라면... 현금은 안될 것 같아 금덩이로 만들어 수건 사이에 넣었습니다. 북한에서 전자시계는 소용없단 얘길 듣고 서울로 올라와 골동품 집을 수소문해서 태엽시계도 구해서 넣었고요.
58년 만에 만나는 날, 멀리서 걸음만 봐도 오빠인 줄 알았어요. 우린 서로 울지 않았어요. 왜 웁니까. 살앙(살아서) 보는 것만 해도 기쁜 일인데. ‘골을 말 골을 시간이 아까우난(하고픈 말 말할 시간이 아까우니까) 그 약속을 잘 지켰지요.
내가 밭이며 선산이며 그냥 다 있다고 했더니 왜 밭을 팔아 쓰지 않았냐고, 어떻게 살았냐고 하더군요. 제가 말했어요. ’ 그걸 어떻게 팝니까? 부모님 조상 전인데..‘ 우리 때문에 너네(너희들) 고생했는데 이제라도 다 팔아서 쓰라’고 하더군요. 나는 부모 제사. 명절. 벌초. 이장 다 하며 오늘까지 살았지만 아버지 재산을 오빠에게 돌려줘야지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다들 저에게 ‘그거 하루에 팔아 써도 아무 말할 사람이 없는데 고생한다’고 했지요. 하지만 사람은 요, 절대 바르게 살아야 헙니다. 내가 바르게 살아야 자식도 떳떳해지고 그 밭을 팔아 내가 왕부자 되면 자식들에게도 짐이 되는 겁니다. 다 사람은 살게 마련이니까요. 오빠는 북에서 결혼하여 자식을 7명 낳고 손주도 6명이 있었습니다.
오빠를 만나며 북한의 실정을 좀 알 수 있었나요?
우선 아주 좋구나 , 없는 사람 살기는 참 좋다. 여기서는 없는 사람은 교육이고 뭐를 못하는데 거기서 오빠는 대학을 3번이나 나왔다고 해요. 머리만 있으면 뭐하고 싶다 하면 딴 과 들어가서 또 하고 또 하고. 나라만 북한이다 헌 것뿐이지, 없는 사람 살기는 나은가 봅디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며 적십자사가 제공하는 좋은 쇠고기를 먹을 때 오빠는 ‘우리는 이런 것 한 번 안 먹어봤다’고 하더군요.
오빠 아들들이 청와대 같은 데서 근무하니까 이산가족 중에 오빠에게만 인사드리러 오는 사람이 많았어요. 오빠는 ‘큰아들 바람 때문에 인사하러 오는 거야’하고. 어디라도 마찬가지, 자식이 권력이 있으면 부모도 더 대접받고. 이름이 없으면 인사 오는 사람도 없고, 자유가 없어도 오빠는 왕이더라고요. 젊어서는 평양에서 일하다가 60이 넘으니 시골로 들어가 살고 있었어요. ‘나 애기들 돈 먹지 안햄져게( 나 자식들 신세 지지 않는다), 연금 받는 돈이면 충분하다’고 해요. 여기 있었으면 아기 안티(자식에게) 얻어먹음 뿐 아무것도 없을 텐데. 올케는 죽었는데 제주사람만 묻는 공동장이 있어서 고향을 떠나 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연을 다 써 올려 비석에 세웠다고 합디다. 여기서도 북에서 내려와 죽은 이들이 가는 공동장이 있을 겁니다.
오빠를 만난 지 10년이 흘렀군요, 그 후 사는 것은 어땠습니까?
오빠가 생생한 대로 있고 자식들도 그런 외삼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제는 원이 없습니다. 오빠가 헤어지면서 ‘큰누님은 나이가 있으니 어렵지만 이선이는 또 한 번 만나 진다’고 하던데 100살까지 살면 만나 질지도 모르지요. 그동안 부모 죽고 장대 같고 자랑스럽던 오빠들 없어지니 그동안은 결혼을 해봐도, 무슨 좋은 일이 생겨도 즐겁지가 않았어요.
작은오빠 만나고 돌아와서 부모님 산소 비석을 싸안듯이 한 위치에 <남매 상봉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뒷면에는 오빠 자녀와 증손 이름을 넣고 조카들이 비를 세우는 것으로 했어요. 언제 와서 봐도 보겠지요.
남매 상봉기 비석
2007년 5월 12일 대한민국 접십자 주최 제15차 이산가족 상봉일
아버지의 장녀 일선 차녀 이선, 삼녀 복선 조카 신배 창배 외손 김석환 박영선 숙질이 북한으로 가서 58년 전 헤어져 만나지 못하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 권배 오빠를 만났습니다. 22세에 이별한 오빠를 만나보니 백발이 성성한 80세였고 슬하에 3남 4녀 7남매 증손도 4남 2녀 6남매를 두고 있었습니다. 행여 살아계실까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인내의 세월 수없이 흐르던 눈물 부모님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해 밤을 지새우던 순간들이 권배 오빠를 만나 번창한 가족들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니 봄 눈 녹듯 사르르 사라집니다. 슬프다 제주민의 통한이 서린 4.3 동란으로 아버지 51세 어머니 49세 그 젊은 나이에 애통하게 돌아가셨으나 손자 7남매 증손 6남매 13명의 후손들이 이 하늘 아래 훌륭하게 자라 어머니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손 13명의 이름을 비에 새겨 아버지 어머니 묘 앞에 세우노니 이제 받아들이시고 누구보다도 벅찬 감격과 기쁨만 간직하고 극락왕생하기를 두 손 모아 비옵니다.
서기 2008년 3월 7일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자녀들 삼가 세우다
오빠가 고향에 올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비석을 하셨나요?
아닙니다. 오빠는 고향에 오지 않을 겁니다. 수술을 네 번이나 했으니 돌아가셨을지도 모릅니다. 4.3에 대해서는 맨날 골암실거우다마는 (말하고 있을 겁니다만) 고향은 바라보기도 싫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 보면 우리 부모 죽인 사람인가 생각해져서 더 괴롭다고. 우리 마을에서 얼마나 서로 죽였습니까. 위에서 시켰으니 그들도 안 할 수가 없지만 친척끼리 죽이게 했습니다. 우리 친척 한 분은 대창 든 조카뻘에게‘ 야, 느 나 죽여지커냐? 게 므로사 느가 날 모르커냐’( 너 나를 죽일 수 있겠니, 아무려면 네가 날 모르겠느냐)했다고 합니다. 수용소에 갇혀서도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들이 활동을 했으니 조금도 섭섭지 안 허주 마는(않지만) 여기 다른 부모들은 아들이 공부도 못해보고 활동도 안 허고 그저 청년이다 하는 것뿐인데, 아들 산에 올렸다고 가두니 그게 더 억울한 일’이라고요. 그 사람들을 어느 날 나오라고 해서 조천지서 앞 밭에서 몇 차례로 총살시켰습니다. 그 큰 밭이 지금 그냥 있습니다. 라도 세워야 할 건데, 거기서 죽은 가족들이 더러 남아있으니까요.
김이선 씨 (2018년 모습)
조천 만세동산에 기념관을 때 김이선 씨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기미년 독립만세도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시작되었지요. 4.3 사건에 조천 청년들 안 죽었으면 조천이 왕 될 건데 지금은 조천이 꼴등 아닙니까. 그땐 똑똑한 사람들이 다 사상 활동을 했으니까. 개인이 잘살자고 헌 일도 아니고 바르게 살아보젠(보려고) 한 일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을 북한 쪽만 들었다는 뜻에서 몰매 맞듯이 다 죽여버렸지요. 남노당 사람이라고 해서 나쁜 사람인가요, 다 사람이지. 그때 북한 쪽만 좋다고 해서 한 게 아니라 딱 바른 길을 걸어보젠 허단 보난(하다 보니까) 한쪽으로만 몰아가서 다 죽여버린 것 아닙니까. 난 그런 일에 대해선 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조천리에는 팽팽한 사람이 없어요. 이런 꼴찌 마을이 돼버린 게 너무 억울해서 더 나섰지요.
조천리에 항일기념관 부지 마련할 때 맨 처음 밭을 내놓았습니다. 관에서 땅 사는데도 마을에서 땅 파는데도 노력했습니다. 리장이나 군수가 7-8번 가도 해결 못하면 내가 나섰습니다. ‘야 우리 괸당(친척)은 땅 680평 공짜로도 내놔신디 넌 베락같이 돈 받고 팔아주는 것도 못하면 사름이야’ 하면서 도장받아다가 군유지를 줘서 해결해서 성역화를 만들었지요. 면장이 나를 추천해서 나 때문에 해결되었다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수장 학살과 헛묘>
무혼 굿은 익사한 넋을 건져내는 굿을 말한다. 예부터 제주 지역에서 행해지는 무혼 굿은 바다에 빠져 죽은 영혼의 구제를 옥황상제 이하 모든 신, 특히 바다를 관장하는 용왕에게 간절히 빌고, 이들 영혼을 정상적인 죽음의 영혼으로 환원시킨 뒤 저승으로 보내는 무속 의례이다.
4 ㆍ3 때 군경 토벌대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 가운데 하나가 수장(水葬)이었다. 배를 타고 나가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돌을 달아매 물속에 빠뜨리거나 배 위에서 총을 쏘아 바다로 던진 것이었다. 이렇게 죽은 희생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민간인들에 대한 첫 수장은 1948년 11월 5일(음력 10월 5일)에 이뤄졌다.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소위 사상범으로 분류된 경찰 및 직장인 20여 명을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뒤, 어떠한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이들을 제주 앞바다에 불법적으로 수장시켰다. 당시 군 당국에 의해 은밀히 추진된 이 수장 학살은 사건 발생 18일 만에 한 시신이 떠오르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됐다. 1948년 11월부터 진압이 무자비해지면서 수장에 의한 희생이 컸다. 특히 6ㆍ25 발발 직후 ‘예비검속’의 바람이 거세게 일 때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수장되는 비극도 있었다. 이런 무혼 굿을 할 수 있던 것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증언자 김이선 씨의 경우처럼 보통은 죽은 이들의 혼을 불러다 헛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 망자의 넋을 기린다. 어디서 언제 죽은 지 모르는 사람들이므로 생일이나 집을 나간 날로 제사를 하기도 한다.
제주 무혼 굿 장면 (1981년 한경면 고산리 앞바다, 김수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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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전주의 제주어, 여기서는 증언의 의미를 담고 있다.
** 여기서 활동은 해방된 후 마을단위로 있던 인민위원회에서 일했다는 것을 뜻한다.
*** 대동청년단은 1947년 창설된 반공주의 우익 청년단체이다. 이 단체는 1948년 서북청년회와 함께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여기서는 대한청년단을 통합 전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