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모시
4.3 굿 내력
펼치던 당신은
저승꽃 벌써 피어나
까무잡잡하고
그러나 몸피는
나잇살 군더더기 말끔한
갓 중년의 사내
외까풀 반달눈은
꿈꾸듯 아련하고
환갑의 사내 앞에
맥없이 누운 본능
슬그머니 피어나
야릇한 손가락 쫓아
대롱대롱 매달리고 있었지요
투명한 날개 펼치며
바지랑대 잠자리가
사뿐 착지하듯.
피 끓는 이십 대
토벌대 완장 차고
한라산 눈벌판 휘저어 다닐 때
군인은 지프 타고 소피보러 다닐 때
터진 신발, 갈중이 홑겹 바람에
한라산 박박 기며
더러는 얼어 죽고
더러는 총 맞아 죽고
더러는 굶어 죽을 때
산천 좋아 산 목숨
당신 피의 근원은
이쁜 각시 얻고파 심방길로 들어 간
증조부 내력
거친 피 솟구치는 날라리 청춘
아가씨 꽁무니 좇아 눈이 벌겋게
바람 잡아 휘파람 멋들어지게
스물셋 심방 길 드니
입에서 줄줄 본풀이 사설**
굿 마당 들썩이며 단골들 사로잡고
당신 입 빌어 쏟아지는 영게울림***
집마다 터져 나온 4.3 내력들
아차차 더러는 입 속으로 다시 삼키고
안사인 심방 (사진 제주 칠머리당굿 보존회)
굿판에 솟아오른 날렵한 버선발
야드르르 휘도는 춤사위
굿 마당은
신나락 만나락
설움과 해원의 공간
울음은 더 큰 울음으로 달래고
이승과 저승을 훠얼딱 훨딱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허기진 영혼의 치유자
신의 영매자
마당 해원굿 술김에 오케이
아이쿠, 내가 살아야 굿도 하지
무거운 자리는 피하고 볼 일이라
굿하는 날, 깊숙이 숨어버린 당신****
아무려나 당신은
서른 살에 만난 최고의 예인
작가의 말)
4.3 증언 채록을 시작하던 1988년 초가을, 안사인 씨 집을 찾았다. 그분은 무용담을 펼치듯 살아온 이력을 펼치셨다. 얘기를 들으며 그것은 자신의 삶을 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솜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젊음의 방황 등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보며 심방에라는 자신의 업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안사인 씨는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 가장 끼가 많았던 분이다. 도랑 춤을 잘 추시고 굿 사설 암기력이 탁월하다는 소문처럼 손놀림 하나에도 예기가 자르르르 흘렀다. 얼마 후 그분의 부고 소식을 접하며 그날 그분의 증언이 얼마나 소중했는 지를 두고두고 곱씹게 된다. 그분의 소중한 증언을 "이제사 말햄수다"(한울, 1989)라는 증언 구술채록 집 맨 첫 번째 이야기로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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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사인(1928-1990) 은 제주도 심방(무당)으로 무속 본풀이를 잘하여 "제주도 무속 자료 사전"(현용준 저, 1980, 신구문화사)의 구술을 거의 맡아서 했다.
** 신들의 내력을 풀어내는 일
*** 굿에 청하는 4.3 영혼들에게 빙의되어 통곡하는 것
**** 1989. 제주 4.3 추모제가 처음으로 공개적인 장소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4.3 해원굿을 약속한 안사인 심방은 잠적해버렸다. 최근에야 그 잠적은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안기부에서 부산 해운대 호텔에 감금시켰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