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문형무소 4.3 추모제
4월의 봄비
지금 4월의 봄비는
아기 오줌같이 따뜻해
목련을 간지럼 태우며
기어이 봉오리를 열게 하고
검은 나무 물오르며
심봉사 눈 뜨듯
일제히 피어나는 벚꽃
그러나 4월은 통곡의 달
오름마다 벌건 4.3의 봉화불
푸른 소나무 같은 젊은 청년들
“앉아서 죽느니 서서 싸우자”
오름으로 저 한라산으로
바싹 조여 오는 죽음의 그림자
바싹바싹 타는 어머니들 심장
그 사월은 불가항력의 항쟁
대신 죽어간 어머니 아내 누이들
독립문 전철역 5번 출구로 나오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보인다. 안산 산행길을 가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이 붉은 벽돌집들은 이제 말끔하게 정돈되어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맞고 있다.
건물 안에는 1919년 3.1 만세 운동으로 수감된 많은 젊은 여성들의 기록사진이 있다. 제주에서 상경하여 여학교를 다니던 분들의 항일 기록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해방 후 통일 독립운동 투옥자는 기록에서 제외된 기념관이다.
2021년 4월 3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구 서대문 형무소)
4.3 항쟁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제주 여성의 수는 90명이 넘는다. 하지만 이 분들의 통일운동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기록 자체가 없다.
1949년 무더기로 진행된 7월 군법회의는 최근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다. 적법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졸속 시행되었고 그나마 형무소에 가서야 자신의 형을 알았다는 사람도 많았다. 분단 선거를 거부하고 산에 올라간 것이 죄가 되었던 사람들. 이곳에 수감되었던 제주 4.3 여성들의 연령은 20대가 가장 많았고(31명) 30대(8명), 40대(9명), 10대도 기록에만 12명이다. 해방 후 여성의 인권과 조국 통일을 열망한 일이 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시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여기에 수감된 사람들 대다수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여성들이다.
73주기 4.3 추모제, 서대문형무소 자리
4.3 70주년에 시작된 서울 광화문 추모제 행사가 코로나 시국으로 올해는 광장에서 열 수 없었다. 대신 그 맥을 이어 제주 4.3 범국민위원회가 의미 깊은 장소, 서대문형무소에 73주기 추모공간을 마련하였다.
제주 4.3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 동안 진행된 일종의 전쟁이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학살로 이 당시 제주사람들은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언제라도 국가 기관에 불려 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집 나간 날로 제사를 지내는 집이 늘어갔다. 엉터리 군사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90여 명의 여성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렸지만 갈 곳이 없었다. 고향은 그때까지도 죽음의 땅이었으니까.
13년 전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행방불명된 가족을 위해 13년 전에 유가족들이 제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고인 63 신위를 올렸는데 이 중 어딘가 살아있으나 고향 친지들에게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신위에 올라있는 변연옥 씨는 작년(2020년)에 필자가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 중 25년 형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던 분은 한 사람, 연좌제에 묶인 4.3의 아픔은 남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고향을 지워야 했다. 어머니였고, 아내였고 누군가의 딸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으로 살았던 그분들은 모두 어디서 무엇을...
난 30년 간 4.3 증언 채록 과정에서 그분들의 소리 없는 통곡을 들었다. 통일이 되는 날, 4.3의 영령들은 통일 제단의 맨 앞에 모셔야 하지 않을까. 이 일을 후대로 넘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비념*하는 마음으로 꽃을 바친다.
추모제 전날 서울 마곡중학교 학생들이 형무소 벽을 동백꽃으로 장식해주었다.
추모제가 있던 날, 대부분 산화했을 4.3 수형인들께서 환생꽃으로 오신 것 같았다. 여린 중학생 후손들의 고운 손을 꼭 잡고서.
역사는 거친 풍랑 속에서는 마구잡이로 우당탕탕 흘러가지만 나중에는 맑은 물줄기가 되어 이렇게 아이들의 손길로도 살아난다.
4.3 희생자 유가족 2세들의 모임 < 재경 4.3 유족 청년회> 회원들
어떤 이유로든 제주를 떠나 서울 경기 등지에 삶의 터전을 둔 재경 4.3 유족들은 70세가 훨씬 넘어섰다. 그 뒤를 이어 유족 2세 모임 < 재경 4.3 유족 청년회>가 73년 만에 모여들어 당신들의 자취를 더듬는다. 비는 종일 내려 검은색 모직 정장에 기모 스타킹이 무거웠지만 4월의 봄비여서 그다지 춥지 않았고 마음은 또똣(따뜻)했다. 달디 단 봄비였다.
4.3 희생자들의 영혼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어 동백꽃으로 활짝 필 봄이 저만치 오고 있다.
백 년 후
- 하인(河人)
백 년쯤 지나면
그때는 모두 밝혀지리라
그렇게 오늘
우리를 슬프게 하던
그 무수한 사건이
두 조각 선악으로 그날 드러나리라
누가 애타게 흐느낀
한 마디 울음
한 구절의 시
또는 내가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이며
무엇인가 한동안 몹시 기다리던
우리의 안타까움 같은 것
그것들은 모조리
오늘과는 다른
기막힌 형상을 이루우리라
백 년쯤 지나면
* 제주에서, 무당 한 사람이 요령만 흔들며 기원하는 작은 규모의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