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난
귀신 테운 몸 이우다(*)
일본 생활 30년, 마흔하나에
입에서 피가 괄락 괄락 쏟아져
병원에선 폐병이라 하고
고치진 못하고
밤에 누면 아버지가
피 묻은 입성으로 나타나니
문전 단점(**) 백계 보살 말하길
“생 나무, 생 피 냄새 진동하는구나,
빨리 굿을 허라, 굿을 해야 산다 “
정병춘 씨 댁 시왕맞이 굿에서 영게울림 하는 문순실 심방***
굿 하겠다 약속하고 고향산천 찾아오니
4.3이 몰아쳐 간 내 고향 동복리
부모 집 불타고, 아버지도 저 세상 가고
부모 호상 만들어 굿 하니
아버지 영혼 영신 덕에
목에 피 터지는 병 고쳤수다
그때부터 버는 대로 번 만큼 굿 했수다
이제 일곱 번째 굿이 되엄수다
아버지, 나 살젠 허난
호적 없는 땅 일본에서
포주 업, 파친코, 고기 장사...
도둑질 말고는 안 해 본 일 없수다
죽어도 내 몸 썩지 않을 거우다
나 속 헐려서 난 여덟 아기들
서천꽃밭으로 네 오누이 보내고
아들 둘은 북송선 태워 북으로
고향에 딸 하나
일본에 아들 하나
그렇게 살암수다, 아버지
북에 간 자식들 천대받지 말라고
고깃집, 파친고 돈 나오는 대로
올려 보내는 일이 내 공사가 되었수다
통일은 멀고 훈장만 바글바글
김일성 훈장만 스무 개가 넘었수다
이 훈장은 산간벽지 우물 판 공로,
저 훈장은 트럭 한 대 산 공로
이걸 무슨 짝에 씁니까. 브로치나 할까요
시앙맞이굿 제상 (사진 출저: 한국민속신앙사전)
조상굿 하려니
죽어서도 한 마을에 모여 사는 영혼 영신들
“정병춘 집 굿 하니 어서들 구경 가자”
우르르 올레로 들어오는 거 닮아서
한 명 두 명 모셔 들이는 것이
156명이 되었수다, 큰 굿이 되었수다
(시왕맞이 굿 한 장면, 사진 김성례)
동복 마을 영가님들
제삿밥 얻어먹는
외로운 동네 영혼들
호상 차려 저승길 닦아내니
칭원한 마음 다 내려놓고
나비다리 나비 날듯 훨훨 가십서
폐병 걸려 죽은 어린 동생아
스물여섯 청대 같은 오라버니도
비새(****) 울음 거두고 잘 들 가십서
아버지, 난
귀신 테운 몸 이우다
작가의 말)
정병춘 씨(1917년 생)는 제주도 구좌면 동복리가 고향이다. 동복리는 조선 영조시대 거상 김만덕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홍역에 한 쪽 눈이 실명된 그녀는 씨받이 어머니를 8살에 여의고 아버지 옆에서 살다가 이붓 엄마 구박에 12살에 눈 수술을 구실로 일본에 나가 정착했다. 이후 방직공장 노동자 등의 삶을 살다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4.3을 만나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다. 자이니치(일본 속의 한국인)로 살아야 하는 일본 생활은 대다수가 불법 노동이나 불법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최근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에도 잘 드러난다. 정병춘 씨도 불법 쌀 행상, 파친코 관련 매매 업 등을 하였는데 그녀의 험한 인생은 일본 당국의 검열에 수시로 걸려 감옥을 오고 간 37번의 투옥이 말해준다. 그런 와중에도 정병춘 씨는 고향의 4.3 영령을 달래기 위한 굿을 9차례나 했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서였지만 차차 범위가 넓어져 4.3 때 죽은 마을 사람 156명의 극락왕생을 비는 시왕맞이 굿으로 이어졌다. 4.3 때 찢긴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는 노력이 한 개인의 노력, 피 맺힌 돈으로 이뤄진 것이다. 정병춘 씨의 자녀들은 북에도 가고 일본에서도 살고 제주에서도 산다. 4.3의 상처는 대한민국을 불신하게 했지만 북송선을 타는 딸에게 " 이 땅에 낙원이 있을 리 없다"라고 만류하는 것을 보면 특별한 사상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딸을 위해 북한에 트럭 버스 등을 살 돈을 수시로 기부하지만 훈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분단 조국의 혼란 속에서 북의 조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에게 통일의 의미는 분열된 가족의 재결합이 아니었을까. 정병춘 씨 생애의 한은 마을 전체 4.3 영혼들을 위한 시왕맞이 굿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녀는 마을에 4.3 위령비를 건립항 때도 3천만 원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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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복이나 재주를 갖고 태어 난
** 점하는 집
*** 굿을 할 때 심방(무당)이 빙의되어 사자의 원통한 말을 전하는 의식
**** 울음이 슬픈 제주도 신화 속의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