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여사님 제일 행복한 시간이 언제였어요?
“임순 씨 내가 집에 올 시간이 되었는데 집에 안 있고 또 어딜 가셨습니까?
내가 어디 가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우리 막내가 우리 엄마 집 인터폰 옆 벽에 써 논 낙서다.
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할 때쯤 우리는 어머니가 살고 계신 아파트 단지내 바로 옆 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날부터 우리 아이들의 유치원 등하교와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부터는 방과 후 돌봄까지 오롯이 우리 어머니 문 여사님의 몫이 되었다. 어머니께 탁란한 뻐꾸기같이 얌체 짓을 했음을 요새 부쩍 반성한다.
큰애와 작은애는 두 살 터울이다. 두 아이는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를 마치면 할머니 집으로 가서 내가 퇴근할 때까지 할머니 집에서 같이 지냈다. 대부분은 저녁까지 할머니 집에서 먹고 오밤중이 되어서야 우리 집에 왔었다. 그러니 할머니께서 혹시 집이라도 비울 때면 목에 걸고 다니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고, 둘째는 그걸 유난하게 싫어했다. 그래서 할머니께서 자기가 학교서 돌아올 시간에 집에서 기다려 주지 않고 놀러 나갔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낸 것이다.
우리 집 두 딸은 내가 낳았고, 키우는 건 내 어머니였다. 그래서 내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누린 대부분의 첫 경험들은 울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병원에서 퇴원 해 처음으로 목욕시켜 준 이도 문 여사님이셨고, 우유병을 처음 아이의 입에 물린 이도, 처음으로 이유식을 떠 먹여준 사람도, 유치원 가방을 처음으로 챙겨 차를 태워준 사람도 우리 어머니 문 여사님이다.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외할머니를 통해 세상과 만났다.
이 낙서는 우리 집 작은애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우리 작은애가 그때 참 유별나게 굴었다.) 그때 만 해도 토요일 오전에는 평일이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어머니 집으로 바로 퇴근을 했고, 아이들도 할머니 집으로 왔으니 3대가(엄마, 나, 내 딸) 어머니 집 거실에서 점심을 먹고 뒹굴고 있었다. 나와 어머니는 그때나 지금에나 이런저런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애들은 숙제를 한다고 거실 바닥에 책가방이랑 같이 뒹굴고 있는 너무도 평범한 주말이었지 싶다.
숙제하던 작은애가 가족 중에 누구를 인터뷰해서 그걸 적어가야 한다고 나더러 자기 인터뷰 대상이 되어 달라고 했다. 뭐 쑥스럽기도 하고, 어머니 앞에서 애들의 물음에 솔직하게 답할 자신도 없어서 싫다고 손사래를 치며, 대신 우리는 좀 특별하게 할머니를 인터뷰하자고 했다.
우리 작은애는 할머니나 엄마나 일단 자기 숙제만 하면 되니까 누군들 상관없다는 듯
“그래. 그럼 할머니 할게” 그걸로 할머니 인터뷰해서 숙제를 해가는 걸로 정했다.
거실 한가운데 제법 인터뷰 구색을 갖춘다고 작은 상을 펴 놓고 할머니를 딱 앞에 앉혀놓은 작은 애가
“이름은 뭐예요?” 하면서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다.
“문임순입니다.”
“그럼 할머니 고향은 어디세요?”
“사방 골…. 수곡면 대천리 사방 골입니다.”
할머니와 손녀딸이 제법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럼 문임순 씨는 꿈이 뭐예요?” 이 질문에
문 여사님
“이 나이에 무슨 꿈이 있겄노?”.
“아니 할머니 꿈은 뭐였냐고?” 작은 애의 볼멘소리에
“아~옛날에??? 나는 현모양처였지 ”…. 어쩌고저쩌고 제법 몇 가지를 더 물었다.
“문임순 씨! 그럼 임순 씨가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였어요?” 하고 물었다.
그 질문에 우리 문 여사님께서 너무도 단호하게
“너거 삼촌 낳았을 때지”라고 답하셨다.
“그래, 그런 두 번째로 행복했을 때는 언제입니까?” 하고 묻는데 이번엔 나도 좀 궁금해졌다.
“니 오빠 낳을 때지, 너희 근우 오빠 말이다.”
나도 처음 알았다. 한 번도 우리 어머니가 언제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가 궁금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처음 알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문 여사님은 당신께서 아들 낳았을 때 첫째로 행복했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았을 때 두 번째로 행복했단다. 어쨌든 오빠는 우리 어머니 생에 최고의 선물이었다. 가끔 우리가 존재 자체로 감사하다고 말하는데 우리 오빠가 어머니께 그야말로 존재 자체로 감사한 선물이다.
질문지가 너무 길었다.
“그럼 임순 씨…. 가장 불행했을 때는 언제입니까?”
작은애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이쯤이 되면 나도, 큰애도 두 사람의 인터뷰에 귀가 바짝 세워져 있었다.
“음…. 가장 불행했을 때는 너 셋째 이모 낳을 때, 그때가 참 슬프더마” 라고 하셨다.
‘왜?’라는 질문이 나와야 하는데 갑자기 우리 딸도 분위기가 쎄 했는지. 할머니가 자기 삼촌 낳았을 때 가장 행복했고, 이모 낳았을 때 불행했다니 지 엄마 낳았을 때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아들이 귀했고, 딸이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는 걸 이 아이들은 분위기로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 다음 질문이 바로
“그럼 할머니. 울 엄마 낳을 때는 어땠어?”라고 물었다.
“네 어미 낳을 때는 하도 기가 차서 슬프지도 않았지.”
푸하하하!!!!!
그 순간 우리 애의 표정은 애매해졌고, 어머니도 나를 앞에 앉고 너 낳았을 때 당신께서 기가 차서 슬프지도 않았다고 해버리셨으니 살짝 미안해지셨나 보다. 그 짧은 순간 나랑 눈이 마주친 우리 어머니, 크게 웃으셨다.
그리고는 얼른 분위기 수습하신다고
“아이고 요새는 네 에미 안 낳았음 어쨌을꼬 싶다.” 하셨다.
그렇게 우리 딸은 문 여사를 인터뷰했고, 나는 우리 문여사님의 삶을 살짝 엿본 날이었다.
우리 문 여사님은 당신이 줄줄이 딸을 낳아 그 절망을 경험하셔서 당신 딸들은 시집가서 아들을 낳아 시댁에 떳떳하길(그게 떳떳할 일인지 모를 일이지만) 바라셨다. 그런데 내가 수술까지 해서 딸을 낳더니, 둘째도 딸이라니 또 한 번 무릎이 꺾이시는 경험을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제왕절개로 아이를 셋을 낳을 수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신 분이라 내가 두번째도 딸을 낳았다는 것은 내가 아들이 없는 설움을 겪어야 하는 다른 말이기도 했다.
수술실에서 아이들 받아 포대기에 싸서 나온 간호사 선생님이
“이필수 산모님. 공주님이십니다. ‘하는 순간 우리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고 우짜것네. “ 탄식을 먼저 치셨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작은애를 볼 때마다 세상에 처음 온 애를 반갑게 맞이 하지 못하고 ’우짜겄네‘ 부터 했다며 너무 미안해하신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애교를 부리는 시간 속에, 대학에 진학했을 때. 첫 월급을 받아 할머니를 챙길 때 그때마다 우리 어머니는
“아이고 미안하다~”하는 말씀을 잊지 않으신다.
그래도 어쩌겠냐고…….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문 여사님한테는 아직도 아들이 그렇게 좋으신 것 걸….
PS : 우리 작은애는 아랍어 통·번역사로 지금은 아랍권에 나가 있다. 곧 휴가 나온다는 말에 우리 어머니는 벌써 아이가 좋아하던 음식을 준비하느라 시장을 바쁘게 오가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