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가 피면 화전이지.........
겨울과 봄 사이 경계의 달 2월,
겨울옷을 입으면 어째 좀 미련한 것 같고, 봄옷은 지나친 듯하여 뭘 입도 어색한 2월이 지나면 3월이 온다.
나는 음력 2월 말일이 생일이다. 내가 태어난 해에는 음력 2월 말이 4월이었나 보다. 사주라도 보러 가면 여자가 음기는 없고, 양기로 충만했다고 하니 내가 4월. 양기 충만한 계절에 태어난 탓은 아닐까 짐작한다.
음력 삼월 삼짇날.
옛사람들은 화전을 부쳐 봄놀이를 갔다고 하는데 언제부턴가 나도 봄이 되면 화전을 만든다. 맛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모양과 계절을 느끼고 싶어서 굳이 그 번거로운 일을 한다. 덩달아 가족들도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언제 화전 부치냐고 묻는다. 한두 번 만 해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의무가 된다. 그러니 뭐든 쉽게 시작할 일이 아니다.
화전 이야기를 하니 몇 해 전 해인사의 삼짇날 일이 생각난다.
해인사 바로 뒷산 중턱에 가면 마애불이 있다. 천년을 넘게 해인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애불에 매년 삼짇날, 오월 단오, 칠월칠석, 그리고 9월 중앙절 이렇게 네 번의 차를 올리는 다례제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속해 있는 작은 신행 모임에서 다례제에 올릴 음식(공양물)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 또한 원래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한번 한 게 쭉 그렇게 우리 일이 되어 버린 일이다. (또 덥석 아무 일이나 시작할 게 아니다.)
보통 삼짇날이 음력으로 3월 3일이라 양력 4월 중순이 될 때가 많다. 요즘은 계절이 하도 빨리 가니 그때쯤이면 진달래가 이미 다 지고 없어 화전을 제대로 즐기기가 어려운데 한 삼 년쯤 전 봄이 드디어 오고 절기도 빨리 들어 진달래 화전을 부치기에 딱 좋았던 시기가 있었다.
삼짇날 공양물을 준비하다가 화전을 부쳐 올라가자는 의견이 나왔고 그때부터 내가 너무 신나 버렸다.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이라 화전을 부칠 쌀가루도 거의 다섯 되쯤 준비하고, 전날부터 해인사 올라가 산을 다니며 진달래도 꽃잎도 따고, 해인사 율원 마당에 곱게 핀 늦은 매화도 색깔별로 따서 준비해 놓았다.
절집의 아침 시간은 새벽 6시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설거지하는 팀이 체 설거지를 끝내기도 전에 한쪽에서는 반죽하고, 한쪽에서 꽃잎을 손질하고 오만 법석을 떨어가며 석 되쯤 화전을 만들었지 싶다. 그런데 화전을 만들 줄만 알았지 그걸 담아 중봉까지 올라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해인사 공양간에 있는 플라스틱 반찬통을 몇 개 구해 찬 바람을 쐰 화전을 식혀 담아 올라갔었다. 공양물을 올릴 법기도 시원찮아 플라스틱 반찬통을 그대로 올리는 내게 법문을 하러 올라오신 다주스님께서(차를 관장하는 스님)
‘보살, 그 예쁜 걸 담을 그릇이 그것밖에 없던가?’ 하셨다.
‘네 스님, 그릇을 미처 준비 못 했습니다.’라는 말로 대답하긴 했지만 예쁜 화전을 전혀 예쁘지 않은 플라스틱 반찬통에 담아서 마애불까지 갔으니 화전에게 미안했었다.
그 예쁜 화전을 그 안 예쁜 플라스틱 통에 담은 기억으로 오랫동안 그날을 기억하게 되었다.
해인사에서 화전을 부칠 준비로 분주했듯이 집에서 화전을 만든다고 하여 분주하지 않은 게 아니다.
쌀가루가 있어야 하고, 꽃잎이 있어야 하고, 설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봄이 온다 싶으면 89세 되신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쌀가루를 준비해 주신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찹쌀만 빻아도 찐득거리고 식으면 딱딱해져 맛이 덜하고, 찹쌀가루에 멥쌀을 섞어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해야 맛이 좋다고 하셨다. 그렇게 불린 쌀을 방앗간에 들고 가 빻아 와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굳이 집에서 쌀을 불려 가는 수고로움을 할 일은 아니다. 방앗간에 미리 주문하면 아주 맛있는 비율로 참쌀과 맴쌀을 섞고, 간도 맞춰 빻아 준다. 그렇다고 매번 찹쌀가루를 빻아 올 수도 없고, 한 번에 먹을 만큼 적은 양으로 쌀가루를 빻아 주지 않기 때문에 기본으로 한 되 정도 빻아 소분해 냉동 보관하면 된다.
화전을 부치려 맘을 먹은 날이면 먼저 산길로 나서야 한다.
강아지를 대동하고, 남편과 동네 뒷산을 올라 꽃잎을 딴다. 가끔 남해 어느 산길을 가다가, 해인사 근처의 숲길에서 따 오기도 하지만 집 근처 산에 핀 진달래가 제일 싱싱하다. 꽃잎 한 장에 화전 한 개가 만들어지니 굳이 힘들게 핀 꽃을 많이 따 올 필요는 없다. 진달래 꽃잎을 따면 매화꽃 잎 몇 개도 좋다. 어차피 화전은 쌀가루 맛으로 먹는 것이니 꽃잎은 눈을 호강시킬 몫이다. 꽃잎이 준비되었다면 반죽을 해야 한다.
화전 반죽은 익반죽으로 해야 한다. 물을 팔팔 끓여 아주 조금씩 부어가며 반죽해야 해야 하는데, 물을 많이 부었다 싶으면 화전은 물 건너가고 그때부터는 전병을 부쳐야 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물기를 쌀가루에 묻혀만 준다 싶을 만큼 뜨거운 물과 쌀가루를 섞다가 쌀가루가 엉긴다 싶으면 꽁꽁 눌러서 서로 붙여주면 된다. 좀 빡세다 싶어도 계속 치대면 지들끼리 엉겨 붙어 찰지게 반죽이 된다. 많이 치댈수록 나중에 화전을 부쳐 놓았을 때 모양이 찢어지지 않고, 맛도 좋다.
반죽이 말랑말랑 탱탱해지면 살짝 면포를 덮어 두고, 이젠 팬을 중불에 올려 준비한다. 그리고 식유는 아주 조금…. 솔로 살살 묻혀 준다 싶을 만큼만 넣어 팬에 달군다. 달궈진 팬에 탁구공만 한 크기로 새알을 빚어 서너 개를 올려놓고 아랫부분이 노릇하게 익었다 싶으면 뒤집는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 새알 모양을 살살 펴서 화전으로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호떡 만들 때처럼 밥그릇 바닥으로 꾹 눌러주면 되겠다 싶겠지만 그게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모양도 별로다.
나는 밥숟가락 뒤편에 식용유를 살짝 묻혀 살살 눌러주면서 얇아질 때까지 편다. 눌러준다는 느낌보다는 두들겨 준다는 느낌으로 톡톡 친다는 게 더 가까운 표현이지 싶다. 이때 반죽이 너무 두꺼워도 맛이 덜하고, 너무 넓적하게 펴도 모양이 영 안 난다. 꽃잎이 중앙에 올라갈 만큼 펴 놓고 아랫부분이 노릇해지면 바로 뒤집는다. 그리고 꽃잎을 올리고는 뒤집어 10초 정도만 살짝 뒀다가 뒤집어 아랫부분이 딱딱해질 때까지 익히면 끝이다. 꽃잎 부분을 너무 익히면 꽃잎이 색이 바래 안 예쁘니 조심해야 한다.
잘 부쳐진 화전에 꿀 종지를 곁들여도 좋고, 집에서 먹을 때는 설탕을 솔솔 위에 뿌려 먹는다. 나는 꽃보다는 설탕 파다. 같이 마시는 음료는 커피보다는 차다. 그게 봄맛이 훨씬 가깝다.
화전은 일 년에 한 번이지만, 꽃잎을 생략한 찹쌀 부꾸미는 아이들 고등학교 때 야식으로 자주 만들어 먹였다. 지금도 아이들은 집에 오면 찹쌀 부꾸미를 찾는다. 그러니 지금도 우리 집 냉동실 찹쌀가루는 아이들이 언제 오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