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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 유기농, 무보존제 식품의 공통점은?

깊은 밤, 하는 수 없이 켜진 조명

by 김상옥 Jan 05. 2025

샘킨은 타고난 이야기꾼입니다. 과학잔혹사라는 제목을 보고 살짝 재미에 대한 의심(?)이 있었으나, 사라진 스푼에 버금가는 뛰어난 책으로 생각됩니다. (사라진 스푼은 과학사를 잘 정리한 정말 재미있는 책입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과학은 좋은 것이고, 과학 연구를 진전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정당화가 될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인류를 고통에서 해방하기 위해, 잠깐 동안만 소수의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책에서는 매독 치료에 관한 비윤리적 연구 사례를 보여줍니다.


 금연, 유기농, 색소와 보존제가 들어가지 않은 식품, 이 방법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치 의사들이 개발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국가로 확장하여, 사회에서 병 같은 존재인 유대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었죠. 독일인 의사의 절반이 나치당에 가입하였고, 나치의 비윤리적 의학 실험에 가담한 것으로 보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의사 1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7명이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환자의 권리를 강조한 연구 윤리지침을 공식화했는데, 이를 뉘른베르크 강령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의 의료계에서는 이 강령에 대해 자신들과 큰 상관이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정신병자들만 그렇게 비윤리적 행위를 할 것이고, 문명국의 의사인 본인들은 그런 강령이 필요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미국 공중보건국의 백인 의사들은 매독 연구를 위해 앨라배마주 터스키키라는 지역으로 갑니다. 이 지역의 주민은 대부분 흑인이었고, 매독 감염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의사들은 이 지역사회를 돕기를 원했고, 지역 주민들은 이들을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의사들이 한 짓은 참혹했습니다. 당시 페니실린으로 매독을 일주일 정도면 치료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터스키키의 매독 환자에게 페니실린을 쓰지 않았습니다. 매독의 장기적 효과를 조사하려고 시작한 연구였기에, 환자들을 빨리 치료하면 연구 성과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의사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이 연구를 통해 인류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는 윤리적인 문제 외에도 실험 설계 측면에서 신뢰도가 매우 낮았습니다. 허접한 연구 설계가 불필요한 고통을 생산한 것입니다.


 이 연구에 참여한 의사인 존 커틀러의 실험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는 교도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임질 연구를 했습니다.(지금은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는 것이 연구윤리에 위배되지만, 당시에는 가능했다고 합니다) 실험 그룹의 음경에 신선한 임질 고름을 묻히고 임질에 걸리는 비율을 측정하려고 했죠. 하지만 이 방법으로 임질이 좀체 걸리지 않다보니, 연구는 열 달만에 중단됩니다.


 그러다 그는 괴테말라 출신의 의사의 요청을 받아 괴테말라로 성병 연구를 하러 떠납니다. 커틀러는 여기서 좀더 발전된(?)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단순히 음경에 임질 고름을 묻히는 수준에서는 병이 발생하지 않으니, 매춘부를 고용해서 재소자들과 성관계를 맺게 했습니다. 이때 당시 괴테말라에서는 매춘이 합법이었습니다. 커틀러는 그들의 성행위가 끝나자마자 사타구니에 코를 대고 성기의 분비물을 살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감염율은 높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름을 적신 솜을 피험자들의 요도 속으로 밀어 넣거나, 귀두를 이쑤시개로 긁은 뒤 그 위에 고름 액체를 부어 감염시켰습니다. 그는 결국 이 방법으로 기초 감염율에 대한 데이터를 얻었죠. 더 놀라운 것은 커틀러는 이 과정을 워싱턴에 있는 자신의 상사에게 보고했고, 그들도 감명 깊어 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공중보건국 소속의 동료 의사 중에는 커틀러의 연구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1948년까지 공중보건국은 커틀러의 실험에 22만달러 정도를 지원했고, 공중보건국의 수장이 교체되자 이 실험도 중단됩니다.


 커틀러는 자신의 괴테말라 연구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연구적 성과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연구가 세상밖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2005년에 한 역사학자가 커틀러가 강의했던 피츠버그대학에서 1만쪽에 달하는 공책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커틀러는 2003년 자신의 연구가 폭로되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정말로 영원한 비밀은 없나봅니다. 무엇보다, 1만쪽에 달하는 공책을 뒤진 연구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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