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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Sep 10. 2019

아이도 아는 걸 실천하기는 어렵다

32개월 기저귀 떼기 퇴행 시기를 겪으며 깨달은 점

  소아정신분석가이자 발달심리학자인 에릭슨의 발달이론에 따르면, 만 2세부터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자율성과 주도성이 크게 발달한다고 한다. 이 시기에 유아는 자기 신체 조절 능력을 알아가고 연습하면서 자율성과 수치심을 적절히 경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의지'를 키울 수 있는데, 바로 이때가 배변훈련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인 것이다.


 딸아이가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 20개월 무렵, 유아 변기를 하나 들여놨다. 화장실에 있는 어른 변기와 모양도 물소리도 똑같은 자신의 변기에 아이는 한동안 많은 관심을 보였다.


 기저귀를 입은 채로 앉아 쉬하는 시늉도 하고, 끙끙 소리를 내며 응가하는 시늉도 했다. 대소변(시늉)을 마친 후에는 어김없이 물을 내려고 시원하게 물 내려가는 소리에 물개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가끔 자신이 아끼는 호비나 하마, 오리 인형이 쉬 마렵다며 자신의 변기에 앉히기도 하면서 아이는 점점 유아 변기와 친숙해졌다.




배변훈련용 유아변기에 스스로 앉아서 볼일을 보는 아이 © 엄마 엘리



엄마, 쉬, 쉬 마려워요!




 두 돌이 지났을 때쯤, 아이는 쉬 마렵다고 의사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기저귀를 내리고 변기에 앉아있는 횟수가 늘었고, 10번 중 3번은 실제로 변기에 쉬를 하기도 했다. 유아 변기에 쉬를 한 날에는 아빠와 함께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면서 잘했다고 진심으로 칭찬해줬다.


 호비 월령 프로그램에 있는 "팬티를 입으면 슝~슝 구름처럼 가벼워요~, 팬티를 입으면 부들 보들 양처럼 부드러워요~" 노래도 함께 부르고, 배변 훈련에 도움이 되는 그림책도 함께 읽으면서 아이의 배변 훈련이 즐겁고 편안한 환경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이가 이대로 쉽게 기저귀를 뗄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호비랑 나랑 26개월_팬티를 입으면 그림책 캡처 © 엄마 엘리



 하지만 육아가 어디 뜻대로 되는가 말이다. 배변 훈련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5개월 부터며 팬티를 입을 수 있겠구나, 생각해 미리 아이 팬티를 사놓고 빨아두었건만, 아이는 팬티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아 변기에 소변을 보는 '놀이'에 싫증이 났는지 이상하게 변기에 앉는 횟수도 차츰 줄어들었다. 일부러 외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월령 프로그램 호비랑 나랑 26개 월편에는 호비가 팬티를 갈아입고 좋아하는 내용이 있어 함께 읽었고, 그때마다 채유도 가볍고 부드러운 팬티가 있다고 넌지시 얘기해줬지만 아이는 시큰둥할 뿐이었다.



 재촉하지 말고 기다리자

 

 뭐든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법이다. 의지가 없는 아이를 억지로 연습시킨다고 될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기저귀를 빨리 뗀다고 특별히 더 좋을 일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그리고 몇 개월 팬티의 'ㅍ'도 꺼내지 않고 생활했다. 아이도, 나도 배변 훈련 시기라는 것을 잊은 채.



나 팬티 입을래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가 갑자기 팬티를 입겠다고 했다. 지난 8월 초, 딱 31개월이 되던 달이었다.


 그러더니 하루아침에 팬티를 입고 어린이집에 가서 생활했다. 팬티 입은 것도 처음이고, 집이 아닌 다른 곳에 가는 것도 처음이라 내심 걱정했지만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잘 지냈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는 팬티를 입고 어린이집에 갔고 몇 번 실수를 하긴 했지만 낮 동안에는 팬티를 입으면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팬티에 금방 익숙해졌다.


아, 역시, 아이의 의지가 중요하구나!

차분히 기다려주면, 때가 되면 아이는 스스로 다 하는구나! 깨달았다.




24개월 이후 아이는 자신의 활동을 스스로 계획하고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주도성'이 부쩍 커진다. © 엄마 엘리

 


팬티 싫어! 기저귀 입을래요

 


 그렇게 한 달 내내 팬티를 잘 입던 아이가 다시 한번 팬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32개월에 접어든 이번 주에 갑자기.


 아이는 쉬 마렵다, 응가 마렵다 표현을 잘하면서도 화장실에 가자, 하면 머뭇거리다가 그냥 팬티에 쉬를 했다. 밖에 나가서는 꼭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면서도, 집에서는 놀다가 그 자리에서 쉬를 하기도 했다. 쉬할 때가 된 것 같아서 (속으로는 아이가 쉬를 할까 봐) 화장실에 가자고 물으면 괜찮다, 안 마렵다고 하다 얼마 뒤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괜찮아, 괜찮아.. 말로는 괜찮다 하면서 아이가 실수를 반복할수록 내 표정은 괜찮지가 못했다. 또 쉬했어? 하며 한숨이 나왔고, 변기에 잘하면서 왜 그래? 하고 아이를 탓하는 말도 내뱉었다.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팬티를 빨고 바닥 닦고 소변이 묻은 책이나 장난감을 치우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나도 예민해져서 싫은 내색을 너무 표 나게 하고 있었다. 대소변 마려우면 화장실 가야 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자꾸만 (엄마 눈에는 일부러) 실수하는 아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는 실수를 하고 나는 원망하고. 이 과정이 반복되자 아이는 급기야 팬티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에게 왜 기저귀를 입고 싶은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젖을 까 봐...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원치 않게 자꾸 실수를 하게 되면서 스스로도 위축되고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실수를 두려워하고 있는 아이의 마음을 알고 나니, 그 두려움을 다름 아닌 내가 심어준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아이는 기저귀를 입었으면서도 쉬가 마려울 땐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쉬를 한다. 만약 의도치 않게 실수를 하게 되더라도 기저귀에 싸면 엄마에게 혼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이 입장에서는 기저귀를 입는 것이 마음이 더 편했던 것이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아이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쉬를 화장실에서 해야 한다는 것은 아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려울 때 딱 맞춰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는 것은 세 살 배기 아이에게 아직 어려운 일이다. 안 마렵다가 갑자기 마려워서 참을 수 없을 때도 있고, 팬티를 내리다가 실수를 하기도 하고, 팬티를 입고 쉬를 하기도 한다.


 32개월, 아직 아이는 배변 훈련을 하는 과정에 있다. 배변은 심리적인 요인이 크기 때문에 잘 가리던 아이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사를 한다던가 동생이 생겼다던가 급작스럽게 환경이 변한 경우, 놀이에 집중하는 집중력이 길어진 경우, 불안감과 수치심이 심해지는 경우 등등 이유도 다양하다.


 이 과정을 통해 부모가 차분하고 침착하게 반응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에게 팬티를 입고 실수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이며, 여러 번 반복해서 실수해도 정말 괜찮다는 것을, 눈빛과 표정, 말투, 행동으로 느낄 수 있게 해야겠다. 그래서 아이가 마음 편하고 기분 좋게 배변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비록, 하루에 팬티를 여러 장 갈아입히고 등을 굽혀 걸레질을 하고 빨래를 여러 번 돌리게 되긴 하겠지만. 그까짓 거 하면 되지. 길어야 몇 달뿐이 더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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