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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제 본느 Jun 20. 2020

2년만 취직을 했다고 생각하자

나는 이 집 가사도우미다.

새벽에 아이들이 뒤척이자 나는 또 잠이 깨버렸다. 화장실을 가려고 나왔는데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남편의 정장 구두가 보인다. 아이들의 흙이 잔뜩 뭍은 신발보다도 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남편의 구두가 더 더러웠다. 더럽다 못해 역겨웠다.


출근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조용히 다시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잠시 후 그가 나와 물을 따라 마시는 소리가 들렸고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가 들린 후,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가 출근한 것을 실감하고 나서야 나는 살며시 다시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정수기 옆에 그가 마시고 간 유리잔이 보인다.   


‘저걸 창밖으로 던져버리면 사람들이 다치겠지’

‘싱크대에 던져버리면 유리 파편이 튀어서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겠지’

‘쓰레기통에 유리를 버려도 되던가’   


결국 나는 퐁퐁을 스펀지에 다섯 번 사정없이 짜고는 유리잔이 부서져라 닦고 가장 뜨거운 물로 헹궈냈다. 옳은 선택을 한 거라고 나를 다독이며 설거지를 하는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진다. 감정을 저 안으로 꽁꽁 숨기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아무도 없는 아침의 주방은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을까. 아이들이 깨기 전에 감정 정리를 해야 했다. 뜨거운 물을 믹스 커피에 붓고는 휘휘 저으며 물결 따라 생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난 어떤 일이든 아이들을 위해서는 할 수 있다’   


다이어리를 펼치고 적은 다음에 밑줄을 죽죽 그었다. 남편을 상사라고 생각하고 이 집을 일터라고 생각하면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하는 이 직장은 상사 빼고는 괜찮은 편이었다. 어디든 가서 아이들을 위해 험한 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들을 생각할 때 최선의 방법은 이 집에서 그대로 남편의 말을 그대로 들으며 살아내는 것.   


‘이곳은 내 직장이다. 살림은 내 일이다. 육아는 내 일이다. 그는 상사이다’   


문장 그대로 남편이 나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동그라미 치고는 옆에다가 적었다.


‘딱 2년만’  


별표를 치고 종이가 찢어져라 밑줄을 죽죽 그었다. 그리고는 내가 이 집에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남편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직원의 권리와 복지를 적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자고 난 후의 시간은 내 사생활이니 상관하지 말 것. 인격 모독을 하는 언어나 행동은 삼갈 것. 부탁할 일이 있다면 회사 직원에게 하듯이 정중하게.’


다이어리에 이 글자들을 적어 놓고는 차가워진 믹스 커피를 한입 머금고 반복해서 눈으로 읽었다. 식은 믹스 커피는 달달했지만 씁쓸하며 입에 남은 끝 맛이 기분 나쁘게 떫었다. 떫은맛을 잊으려 컵에 남아있는 커피를 마저 다 마셨지만 여전히 떫었다.


믹스커피는 마시는 순간은 달달 하지만 마시고 나면 금세 후회하게 만든다.

내 결혼 생활이 어쩜 이리도 믹스커피 같을까.

신혼의 달콤함은 한 순간 뿐이었고 그 후에는 후회만이 가득했다.




칫솔을 가지러 안방 화장실에 들어가니 새벽에 뿌리고 간 남편의 향수 냄새가 진동을 한다. 향이 강한 걸 좋아하는 남편. 그가 고른 민트향이 짙은 치약으로 혀를 여러 번 닦고 입안 구석구석을 닦아내었다. 무향을 좋아하는 내 취향 따위는 그렇게 버려내고 남편의 취향으로 나를 덮어버렸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질끈 묶었다. 남편이 샤워를 하고 닦고 간 축축한 수건이 그렇게 싫었는데 집주인의 수건이라고 생각하니 내 얼굴을 닦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바지를 무릎 위로 올리고 화장실 바닥이며 벽에 락스를 사정없이 뿌렸다. 수세미로 그가 샤워하고 간 샤워실 바닥을 벅벅 문지르며 닦기 시작했다. 그가 남기고 간 향수의 잔향은 금세 락스 냄새로 뒤덮였고 나는 물을 뿌리지 않은 채 안방 화장실 문을 그대로 닫고 나왔다. 락스가 그의 모든 흔적들을 지워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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