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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제 본느 Jun 29. 2020

마지막 협상 그리고 최후의 통첩

끝까지 당신과 나는 안 맞는구나.

"나는 이제 당신에게 어떠한 감정도 남아있지 않아. 더 이상 이 지겨운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이혼만이 답이라고 생각해."

남편: 그건 내가 할 소리고.

"당신을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나는 아이들의 엄마로서 마지막 제안을 하나 할까 해. 남들 다 한다는 부부 상담을 한 번은 받아보자. 그리고도 안되면 이혼하자."

남편: 난 생각 없으니 너나 해. 정신병원 꼭 가보고.


더 이상 난 할 말이 없다. 할 의지도 사라졌다. 마지막 카드라고 던진 나의 협상 카드를 그는 찢어버렸다. 아이들에게 적어도 나는 이야기할 변론 거리가 생겼다. 엄마는 아빠와 마지막까지 잘 살아볼까 싶어 노력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고. 이 정도면 내 입장에서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야 한다.


아이들을 재우고 자려는 남편을 붙잡아 이야기를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밤 12시가 넘었지만 홀로 가장이 되었다 생각이 드니 잠이 오지 않았다.


월세 2000/50 짜리 노부부가 사는 작은 주택의 별채. 좋아 이만하면 합격.

짐은 최소화를 하고 미안하지만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줄여달라고 해야겠다. 그 외에 불필요한 짐들은 확 줄이기.

집이 팔리고 나면 그나마 전세금을 얻을 수는 있을 테니 그전까지는 일단 적금을 깨서 생활비로.

아이들 보험은 내가 유지, 연금은 깨서 생활비로 내가 일을 구하기 전까진 사용.

어린이집과 학교는 월세방 근처로 옮겨야 할 듯.


집을 욕심부리지 않고 매매한다면 금세 팔리겠지. 그때까지만 연금이랑 적금으로 알뜰하게 버텨야겠다.


알차게 계획을 짜고 마무리를 하려는데 하늘이 슬그머니 밝아지려고 한다. 동이 트는구나. 마음이 생각보다 가볍다. 감정이 모두 없어져야 진정으로 이혼할 준비가 된 거라고 하던데 지금 내 상태를 말하는 걸까?


마침 오늘부터 남편이 2주 동안 출장을 떠나니 그가 없는 2주 동안 짐을 싸서 이사를 준비하자. 남편에게 미움도 화도 나지 않은 채 앞으로의 계획을 문자로 남겼다.


1. 당신이 없는 2주 동안 이사 준비를 해서 당신이 오기 전날 나갈게.
2. 집은 최대한 빨리 팔리도록 가격을 내놨으면 좋겠어.
3. 우리 집은 월세로 갈만한 곳을 알아놨어. 내 적금 일단 깨서 보증금 만들고 아이들 연금으로 생활비 쓸 거야. 내가 일을 구하기 전까지.
4. 법원은 출장을 다녀오자마자 갔으면 좋겠어. 그렇게 한번 가고 나면 3개월 정도 걸리는 것 같아. 소송하지 말고 우리 원만하게 협의했으면 좋겠어. 난 일단 재산은 당신이 나누자는 대로 할 거니 알아서 나눠줘.

아이들은 잘 살터이니 걱정 말고. 혹시 걱정되면 생활비를 좀 보내준다면 고맙고. 아빠의 존재를 너무나도 잘 아는 7살 8살 이기에 갑자기 아이들의 삶에서 아빠를 삭제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해. 정기적으로 시간을 잡아서 당신이 데려가는 걸로 했으면 해. 아직 이혼이라는 단어보다는 엄마 집과 아빠 집이 따로 있다는 정도로 이야기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 정도는 부탁할게.


순간 햇살이 방의 한쪽면을 따스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겠구나. 남편이 나가고 나서는 짐 정리부터 해야겠다. 2주 안에 이사 준비를 시작할 생각을 하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깨기 전까지 잠시 눈을 좀 붙여야지.


그때였다.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아침에 아이들 얼굴 보니 마음이 무겁다. 부부상담받아보자.


. 진짜...

밤을 새우면서 난 모든 정리를 끝마쳤는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내가 그래서 어제 마지막 제안이라고 했는데 당신이 단칼에 거부했던 거 잊었니? 진짜 끝까지 우리는 안 맞는다. 짜증이 밀려오는 순간 그보다 더 큰 피로가 나를 덮쳐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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