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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제 본느 Jul 05. 2020

위기 부부의 세계

그래, 상담이라도 받아보자



무기력했다.

그와의 삶이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껴져서일까.  

상담을 받자고 먼저 제안한 건 나이지만 이렇게까지 오게 되니 과연 상담을 받는다고 우리가 좋아질지 의문이었다.


멍하니 누워서 인터넷만 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나의 기분을 아는 건지 밥만 차려 주고는 안방에 들어와 누워만 있는데도 알아서 잘 놀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거 하자 저거 하자 나를 못 눕게 하던 녀석들인데.


그때 아이들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형아, 이거 엄마한테 해달라고 하자"

"안돼. 엄마 아파"


첫째가 내 상태를 보고 이상함을 감지한 건 분명했다.


'아... 이 좀 아닌데...'


이 집에 그대로 있는 것도 싫고, 나가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었으니 차라리 상담을 받아보자. 이대로 무기력하게 집에만 있기에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계속 그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 방향으로든 지금 이 상황은 끝내고 싶어 졌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나뭇잎 사이로 문득 비치는 햇살이 상담사의 무거운 얼굴을 비추었다. 마스크를 끼고 상담사는 심각한 눈빛으로 결과지를 보았다.  


상담사: 지금 하신 테스트로는 와이프 분이 생각보다 많이 우울해 보이시네요. 언제부터 이렇게 우울하셨을까요?

나: 결혼하고 나서부터요. 그러다가 괜찮을 때도 있었는데 얼마 전 또 서로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우고 나서 이혼하기로 했거든요. 그렇지만 아이들을 위해 상담은 한번 하고 이혼 하자 싶어 여기까지 왔네요. 그렇게 싸우고 난 후부터 급격히 우울해지긴 했어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육아를 하면서 우울감이 감기라기 보단 삶의 일부분처럼 때때로 찾아왔고, 임신했을 때도 우울한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이 우울감은 모두 남편이 원인이라 굳게 믿으면서 내 삶의 한 부분처럼 짊어지고 살고 있었다.

 
상담사: 즐거움에 대한 점수가 아내분이 상당히 높아요.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억울한 감정을 느끼기도 쉽거든요. 

나: 네. 늘 억울해요.

어떻게 아시고 내 아픈 곳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시는 걸까? 대답하면서 나는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상담사: 남편분은 아내분이 많이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아내분은 만족하시질 못하고 있네요.

나: 네. 맞아요.


상담사님이 나를 알아준다는 위로감에 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 에고... 제가 눈물이 좀 많아요.

상담사: 그래서 여태까지 버티셨던 거예요. 눈물이 신비의 묘약이라고도 하잖아요.




나는 3시간 내내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고 그는 차분하게 묻는 말에만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을 했다. 첫 상담이 끝나고 나오는데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이 머리와 어깨에 내리 앉았다. 차갑지만 멍한 나를 깨우는 느낌이 나쁘지 다. 조용히 가는 묵직한 차 안에는 빗방울 소리만 투둑 투둑 린다.


라디오 볼륨을 높이니 91.9에서 HOT의 행복이 나온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무거운 공기 사이로 디제이가 입방정을 떨며 경망스럽게 웃는데 차라리 듣기 좋다. 원래 DJ의 말보단 음악이 좋아 클래식 FM을 즐겨 듣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 대신 신나게 떠들어주는 디제이가 고마웠다.
 
8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느낀 오만가지 감정들과 사건 사고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두 DJ들의 경망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잠시 눈을 감고 그 웃음 뒤에서 쉬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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