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리제 본느 Sep 15. 2020

당신도 힘들었구나, 나만큼

“지금까지 한 테스트의 결과만 봐서는 열쇠는 바다님에게 있는 것 같네요.”

“그런가요? 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세 번째 상담을 받은 후 집으로 가는 길, 상담사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과연 나의 우울감은 기질적인 것인가? 내가 받은 심리테스트들에 대해 검색해본다. 우울질이라는 성향에는 긍정적인 부분도 부정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창조적이기도 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자유로운 영혼인 반면에 비관적이고 슬픈 어두운 감정을 잘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겪은 일에 대해 더 비관적이고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보다 나를 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몰아서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내 성향에서 비롯됐다니 좀 놀랍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내 처지에 더 슬퍼하고 상황을 악화시켜 생각했나. 조수석에 앉아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데 남편이 말을 건다.  


"배 안 고파?"

"배고프지. 우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오빤 잘 안 울어서 모를 거야."

"소곱창?"

"좋지."  


지글지글 익어가는 곱창을 조용히 바라보는데 남편이 소주 첫 잔을 들고 건배를 한다. 


"고생했어."

"오빠도." 


몇 가지의 테스트를 통해서 나의 상처만 있는 게 아니라 그의 상처 또한 깊다는 것을 알게 되니 낯선 연민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아직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남편이 한참을 조용히 먹기만 하다가 갑자기 고백한다.  


"나는 정말 진심으로 우리 장모님 장인어른을 잘 만났다고 생각해."

"아 잠깐만. 갑자기 왜 이래. 나 여기에서 울고 싶지 않아."

"그냥 그렇다고. 아내복은 몰라도 장모님 장인어른 복은 있는 거 같아. 처남도 그렇고. 나 처남이랑 생각보다 자주 연락해." 


농담인 듯 진심을 던지는 그가 어색하다. 그동안 남편이 하는 그 어떤 말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감정 표현을 하는데 너무나도 소극적인 사람이고 나는 감정이 지나치게 풍부한 사람이기에. 남편은 본인의 역량에서 10만큼 표현한 건데 나에게는 1도 안 될 만큼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사실 남편은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만큼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갑자기 내어 보인 속내가 얼어붙은 나의 마음을 툭 건드린다.  


"오빠 억울했겠다. 나는 나만 억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도 억울하니까 좋아?"

"그런 것보단 그냥 이젠 당신을 좀 이해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상담사님이 네가 더 표면적으로 우울해 보이지만 사실 우울감은 내가 더 많다고 하시더라.” 

“그래? 맞아. 나는 눈물도 흘리고 이야기도 잘하고 교회 가서도 기도로 풀고 하니까 이만큼 버티고 살아낸 거라고 하셨어. 그런데 오빠는 그걸 다 담고 살아간다고.” 

“응. 그래서 내가 더 힘들대.” 

“그니까 오빠도 좀 울어. 나처럼.”   

"난 그게 안 되는 사람이잖아."


그가 찌른 칼에 나 혼자 피를 철철 흘리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등에 꽂힌 칼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그의 온몸 여기저기에 꼽혀있는 칼들을 보지 못했다. 아니 알면서도 무시했을까. 내 마음을 털어내고 쓰러져있던 내 몸을 일으켜보니 그제야 그의 등에 꽂힌 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도 힘들었겠다. 나만큼. 

이전 12화 위기 부부의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