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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로보 May 28. 2019

본격적인 명상수련에 돌입하다

단체명상과 저녁법문

첫 사흘 동안은 오로지 호흡만 한다. 정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조용히 코로 들어가고 나오는 숨을 관찰하는 것이다. 숨을 더 깊이 쉬거나 천천히 쉬거나 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호흡을 그대로 지켜보라고 한다. 그리고는 입술 위부터 코 전체를 포괄하는 삼각형 부위를 설정하고 그곳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주의를 집중한다. 


십분… 이십분… 시간이 흐르고… 같은 자세로 계속 앉아 있자니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리다. 그래도 참고 정신을 집중해본다. 그런데 아무 것도 느껴지는 게 없다. 왜냐? 덥지도 춥지도 않은, 조명도 적당히 조절된 곳에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는데 무슨 특별한 것이 느껴지겠나? 그렇게 하루에 9시간을 딴 생각과 싸워가며 코와 인중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DAY3에는 가상의 삼각형을 더 좁혀보라고 주문한다. 콧구멍과 윗입술 사이, 그러니까 인중에 더 작은 삼각형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그 곳에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라고 한다. 이렇게 호흡하는 것을 이 곳에서는 ‘아나빠나’라고 부른다. 


기본적으로 센터 내에서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영어와 한국어로 이루어진다. 단체명상 시간에 오디오로 접하는 지도 내용과 저녁 법문 영상 역시도 고엔카 법사가 꽤 능숙하고 막힘 없는 영어로 얘기를 하고 곧이어 한국어 통역이나 자막이 따라붙는 식이다. 그러나 ‘아나빠나’를 비롯해 실라, 사마디, 빤냐, 아닛짜 등 명상 수련에 있어 중요한 개념들은 전부 빨리(Pali)어로 전달한다. 법문 도중에 2,500년 전 석가모니가 쓰던 말이라고 강조하던데 의심병 환자인 나는 다시금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니 우리는 현대 한국어의 직계 조상이자 AD 7세기에 와서야 멸망했던 신라어도 잘 모르는데 BC 5세기의 언어를 어떻게 알고 지금도 사용한단 말이죠??? 


나중에 찾아보니 빨리어가 산스크리트어와 더불어 불교경전의 기록과 전승에 있어 비중있게 사용된 언어라는 건 맞지만 고유의 문자가 없어 산스크리트어 문자를 빌려 사용해왔으며 기원후 5~6세기 이후부터 기록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기원전 5세기에 석가모니가 실제로 사용했으리라 추측할 근거는 없다고 한다. 흠......   


위에서 고엔카 법사의 영어가 유창하다고 얘기했는데 영어를 잘 하긴 하지만 남아시아 억양이 꽤 선명한 말투였다.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 가본 적 없는 분은 (시트콤인 만큼 다소 과장되어 있지만) <빅뱅이론>의 라지 말투를 떠올리면 대충 비슷할 것이다. 오 억년 전 나의 첫 해외여행지가 인도였는데 당시 만 18세 여행 쪼랩으로서 인도 남자들로부터 사기&거짓말&성추행을 수두룩하게 당했던 안 좋은 기억이 남아 있다. 중남미여행 도중에 쿠바가 ‘중미의 인도’라는 말을 듣고 여행 루트에서 쿠바를 제외했을 정도라면 나의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느낌이 오실지…? 아무튼 나에겐 남아시아 억양의 영어를 쓰는 남자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억양의 유불쾌를 떠나서 고엔카 법사가 굉장한 달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저녁 법문영상은 매번 한시간을 넘는 분량이었는데 조금도 버벅대거나 당황하거나 말의 흐름이 막히는 곳이 없었다. 스튜디오 같은 곳에서 촬영해서 매끄럽게 편집한 게 아니라 수련생들을 앞에 두고 라이브로 녹화한 영상인데도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5~60대 중년 수련생분들이 깔깔 웃으며 푹 빠져서 듣는 모습이 보였다. 교회를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는데 달변인 목사의 설교를 듣는 신도들의 반응이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법문의 내용은 실라(5개의 계율)을 왜 지켜야 하는지, 사마디라는 수련법에 대해 설명하며 옳은 사마디와 그렇지 않은 사마디가 어떤 것인지, 수련을 통해 얻게 되는 빤냐(지혜라는 뜻으로 ‘반야심경’ 할 때의 ‘반야’와 같은 말임)가 무엇을 말하는지 등 명상 수련에 관련된 ‘이론’에 대해서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이 왜 괴로운지, 욕망과 집착을 왜 버려야 하는지 등 석가모니의 생전 일화를 비롯한 불교 쪽 우화를 빌려와 얘기했다. 


듣다 보면 너무나 맞는 말들이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한 이야기들이라 신기하게도 고엔카라는 법사 개인이 꽤나 훌륭한 사람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더라. 그러나 냉정을 되찾고 생각해보니 우리가 사이비라고 손가락질하는 종교들도, 모두를 경악시킨 '빤스목사' 같은 사람조차도 설법시간에 하는 얘기들의 8할은 분명히 ‘좋은 말씀’이지 않을까? 싶었다.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과 '훌륭한 사람'은 엄연히 다른 건데 살다보면 이걸 착각하게 되는 상황이, 특히나 종교의 이름으로 그렇게 되는 순간들이 꽤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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