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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군 Nov 19. 2019

가족 간 거리 유지합시다

전방에 딸내미 있습니다. 속도를 낮춰 거리를 유지하세요.

매일 보면 자주 다투지만 가끔씩 한 번 보면 반갑고 좋은 친구가 있다. 그런 걸 보면 관계마다 적당한 거리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부모님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나에겐 이상적인 부모와의 거리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족이 있다. 중학생 때 영어 선생님이다. 선생님껜 늦둥이 아이가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난 직후나 학기가 마무리되기 전 수업은 특별히 영화를 보여주시거나 담소를 나눴다.


그날도 영화를 본 날이다. <라스트 홀리데이>였는지 <포레스트 검프>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날 만큼 추천해주신 영화 모두 명작이었다.


선생님은 아이가 있는 데서도 부부끼리의 애정행각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다. 아이를 맡기고 두 분이서 짧은 여행을 다녀오시기도 했고 가족 다 같이 함께하는 여행 또한 많이 다녀오신 듯했다. 육아는 육아고 부부와의 시간은 시간이다. 그런 지론이셨다.


아이와도 수직적인 관계라기 보단 수평적인 관계의 친구나 다름없어 보였다.


유달리 그 가족을 이상적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부모가 자식에게 너무 얽매거나 퍼주거나 기대하지 않으려는 그 균형 잡힌 관계가 멋져 보였다.


자립할 수 있는 성인의 나이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지도에 따를 수밖에 없다. 자식들을 믿고 기다려주고 직접 경험해서 배울 수 있게 해 주신다면. 그야말로 '자립'하는 힘을 길러주시면 참으로 좋겠지만 도리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선택의 제한과 경험할 기회를 뺏기기도 한다.


가족끼리의 문제를 가족 안에서 해결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친척, 이웃, 또 다른 어른들이 한 마디씩 보탠다.


필자의 경우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최대한 집 밖에 머물렀다. 내 힘으로 돈 벌게 되면 최대한 빨리 독립하는 게 목표였다. 점점 더 아버지와 자주 싸웠고 나 스스로도 쉽게 화를 내고 예민해졌음을 느꼈다. 싸우고 나면 억울함에 울고 미움이 가득했다.


알바로 모은 돈을 지불하여 상담센터에서 종합검사를 받아 보고 내일로 여행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도 가져봤다. 전공은 점점 나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뚜렷해져 가고 우울함에 힘들었다.


결국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대학 졸업반 때 자취를 하게 됐다.

해방감에 하루하루가 감격스러웠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 집과 달리 내 원룸은 깨끗했고 필요한 물건들만 있었고 내 자유대로 생활할 수 있는 그 공간이 감격스러웠다. 억누르지 않고 눈물을 쏟을 수도 있었으며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본가에 있을 때면 자주 생각했다. 드라마처럼 아무도 나를 상관하지 않는 곳에 가서 편하게 울고 싶었다. 조용히 하라는 다그침을 받지 않고 울고 싶었다. 어느 날엔 슬프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눈물이 나기도 했다. 갑자기 북받쳐 울음이 터졌는데 곁에 사람이 있어서 이내 진정이 된 건지, 아님 참아낸 건지 몰라도 쏙 들어가 버리곤 했다. 참는 게 습관이 되어 우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사람이 울 때는 천사가 곁에서 함께 슬퍼하며 위로해 준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이 괴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천사가 곁에서 위로해 주는 것이다. 이제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는 방해받지 않을 장소를 찾아 마음껏 눈물을 흘려 보자. 아무 생각 없이, 감정이 흐르는 대로,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울자. 눈물만큼 마음에 힘을 주는 것도 없으니까”

_책《힘들 땐 그냥 울어》중에서


한동안 가족이 보고 싶지 않았다. 방학이면 본가로 돌아가는 친구들과 달리 자취방에 머물고 싶은 생각만이 전부였다.


내가 자취방에서 지내는 동안 집에선 엄마가 치매로 인해 길을 못 찾는 바람에 실종신고를 했다. 아빠도 친척도 나에게 방을 빼고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 통학으로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거리였기에 내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엄마의 외출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대뜸 엄마가 집을 나간 게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엄마가 가스불을 켜 둔 것을 잊어버려 주전자가 타버리면 아빠는 나에게 책임을 물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족 안에서 보호자였다. 그게 자취방 계약을 깨고 돌아가야 하는 이유였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느라 철없다, 이기적이다는 소리를 들으며 불효자가 되어야 했다.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 마음 상태가 이러한데 누가 누굴 보호하고 지키라는 건지. 착한 자식, 효녀 효자 하려면 자신의 자유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가.


차라리 나가서 혼자 살면 좋겠다고 말하던 아버지가 이혼하지 못했던 것도, 결국 기숙사로 들어가시더니 잘 지내시긴커녕 입원하신 것도,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일찍 결혼한 것을 후회하시는 것도 다 좋은 아들, 좋은 아빠, 좋은 사람 되려고 하신 선택들은 아니었을지.


그래서 난 남들에게 좋은 사람, 효녀 되려고 스스로를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고 그 힘든 시간에 대한 보상을 자녀에게 기대하는. 그런 대물림을 내 차례에서 끊어내려 한다.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니까. 나 마저 남들의 기대를 나에게 강요할 순 없으니까. 과감히 기대를 저버리고선 "여기까지가 적당한 거리예요." 하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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