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우리가 효녀인지 불효녀인지 누가 정해주는 걸까?
뭐가 착한 거고 뭐가 나쁜 걸까?
두 질문은 답을 내리기 모호하다는 점이 비슷하다.
나의 경우 아버지와 친척들에게 결정권이 있는 듯해 보였다. 22살까지 철부지에 불효녀였고 23살부터 효녀가 되었다. 둘 중 어느 것도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더 잘해보려 한 적은 많았지만, 효녀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호불호처럼 마음에 들면 효녀고 눈 밖에 나면 불효녀가 되는 점도 그 이유로 한 몫했다.
나중에 후회할까 봐 효도한다는 말에 많은 뜻이 담겨있다. 효도에는 크게 두 가지의 효과가 있다. 받는 부모님의 기분이 좋고 드리는 자식 마음이 편안하다. 부모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면서도 자식의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사랑해서 하는 효도는 부모님에 대한 애정으로 드리는 눈짓, 손짓, 몸짓 같은 것들이라면, 난 내 마음이 편하려고 효도를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좋아서, 사랑해서 하는 효도보다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의무와 책임감이 섞인 효도이다.
나도 내가 냉정한 것 같아 한 때는 많이 고민이었다.
작년, 두 계절 동안 상담카페를 다녔다. 상담센터 보다 비용 부담이 적고 진로나 깊은 고민들을 도움받기에 편안하다.
‘아버지가 자주 연락 안 한다고 뭐라 하시는데 그게 너무 스트레스가 돼요. 책임감이 저를 너무 힘들게 해요.’
‘할 수 있는 만큼 하시면 돼요.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으면 억지로 의무감을 가질 필요 없어요. 한 달에 한 번. 좀 더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두 번, 세 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세요. 그래도 돼요.’
상담사의 그래도 된다는 말이 너무나도 위로가 되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런 나 자신을 고쳐야 하는 줄만 알았다. 다들 효도하라고 하니까. 효도에 있어선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곤 안 하니까.
‘여러분 많이 여행하세요. 뭐가 문제예요? 회사는 우리 없어도 잘 돌아갑니다. 망설이지 마세요. 아픈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릴 때 강연에서 들었던 말이 나에겐 꽤 충격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강연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아픈 가족이 있으면 여행에서도 자유가 없다.’는 말이 당연히 아니겠지만 나는 그 말에 염증을 느꼈고 강연이 끝나고 기억에 남는 건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 염증은 나를 애어른으로 만든 원인이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자립심 높은 성향을 키워주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날 더 사랑하게 만들었지만 책임감에 염증을 느끼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었다.
유년 시절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아이와 비교대상이 되어 경쟁해야 했다.
"쟤는 부모님 안 계시는데도 할머니랑 동생 위해서 집안일하고 효도하잖아. 너는 그래도 아빠 있잖니. 외동이기도 하고. 아빠 많이 도와드려야 한다. 아빠한텐 너 밖에 없어."
그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의 불행을 위로 삼아 지금의 내 불행을 위로받고 싶지 않았다. 그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계속 괴로워할 필요는 없지만 있는 불행을 부정할 이유도 없다.
우리 가족은 우리에게 닥친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단합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아버지는 아내의 빈자리에 절망했고 자신도 모르게 나에게 화풀이를 했고 그런 점을 때때로 미안해하면서도 현실이 답답했다.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 가정이 고통받는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버지는 뇌전증에 걸렸다. 국가고시를 친 다음 날 쓰러지셨다. 공동간병서비스가 없는 병원이었기에 보호자가 필요했다. 병원에서 일어나 남은 수업을 들으러 가고 면접 준비도 병행했다.
‘내가 의지할 곳이 없구나..’
‘자취 생활하면서 내 감정을 돌보지 않았으면 벌써 무너졌을 것 같다.’
‘앞으로가 걱정이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
현실을 받아들이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쳤다.
아버지가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할 생각도 들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병원생활이 끝나자 친척들에게, 아버지에게 내 이미지는 효녀가 되어 있었다.
그 점이 씁쓸했다. 사랑 빠진 의무감으로 하는 효도가 얼마든지 효자가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남들 잣대에 따라 효자가 되기도 하고 불효 막심한 자가 되기도 한다. 부모에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선물과 용돈을 드리거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부모가 미안할 만한 일이 생기면 효자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급기야 그런 타인의 시선을 무기 삼아 효도를 강요받기도 하고 부모님은 스스로를 측은하게 여긴다.
그런 게 효자라면 더 이상 그 말장난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
사실 효도라는 단어가 착하다, 나쁘다는 표현처럼 참으로 주관적인 것 같아 별로다.
억지로가 아니라 진심이고 싶다. 효도를 억지로 공부하는 과목처럼 숙제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효자라는 핀잔에는 존중이 없다. 효도는 셀프가 될 수 있을까.
MBC 무한도전_박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