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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군 Nov 21. 2019

효도 증후군

사랑받기엔 내가 아직 부족한 것 같다면

 물리치료사로 근무하면서 자식만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어르신 퇴원하면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

치료사는 환자의 치료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 저 질문을 필수적으로 한다.


그러면 돌아오는 우리나라 환자분들의 대답 1순위.

"그런 거 없어."


저 대답이 가장 많았다. 그래서 보통 화장실 가기, 옷 입기, 식사, 이동, 취미 같은 기능적 활동에 맞춰 목표를 정한다. 그러고 나서 무엇에 흥미를 가지시는지 파악하기 위해 대화를 하다 보면 저마다 다른 이유이지만 가족과의 시간이 우선순위라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며 우울해하고, 자식들이 병문안 오기만을 기다리고, 심지어 가족들에게 돈 벌어다 주느라 일생을 바쳤는데 거들떠보지 않는다며 원망하는 분들도 계셨다.


취미라도 있으시면 좋겠는데 그마저도 대부분 없다 하신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2009년 2월 14일에 방영된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 절망을 이겨낸 사람들의 7가지 비밀>에서 김주환 교수는 한 개인의 가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만 원짜리죠? 이거 그냥 드릴 테니까 가지실래요? 그럼 느낌이 어떠세요?"
"좋지요"
"그냥 갖죠? 그럼 얘를 때리거나 막 밟아요. 짓밟아요. 그래도 가지실래요?
그래도 만 원짜리잖아요. 털어서 쓰면 되죠? 그거랑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남이 나를 짓밟건 나를 구겨버리든 때리든 나는 나다.
남들이 어떻게 보는 거랑 나의 본래 모습, 나의 본디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저 방송을 보면서 어르신들이 생각났다.

자신의 질병, 장애가 스스로의 가치를 바꾸기라도 하는 것처럼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직장을 잃거나 장애를 얻거나 치매에 걸리더라도 여전히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란 것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전적으로 자식에게 걸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픈 부모는 그런 자신의 건강을 자식에게 미안해한다. 자식은 부모가 부디 그녀만의, 그만의 삶을 잘 살았으면 한다.


자신을 지켜가며 자식을 키울 수는 없었나. 육아라는 것은 그렇게 삶의 가치와 의미를 포기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건가. 그러기에 척박한 환경이라면 그 희생에 대한 대가는 자식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 필연인가.


“탁월한 유전자 유전자 아주 귀에 못이 박히게 떠들더니 그 유전자가 겨우 그런 거였어?”
“뭐라고?”
“가난하고 무식하고 무능한 데다, 파렴치한 술주정뱅이의 피가 흐르는 거잖아.
그딴 유전자가 내 몸에 있다는 거잖아, 지금!"
"그래서 최선을 다했잖아! 그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네 자존심에 흠집 하나 없이 키웠잖아"
- 드라마 <스카이캐슬> 중에서 -


가족 위해 돈 벌어다 주는 게 가장으로서 최고임을 부모님과 사회로부터 배우셨고 자신에게 귀 기울일 시간 없이 가족만을 바라보며 버텨온 분들. 자식이 곧 삶의 전부이다. 내가 우리 엄마, 아빠와 같은 세대에 태어났어도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기대하는 게 자신을 해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랬을지도.


부모님은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학원, 학교, 직장, 결혼 그 모든 것을 결정할 때 다가와 지름길로 가라 신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답이 정답이며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의를 담은 의도가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로 나타나진 않는다. 도리어 자식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부모님의 충고에 따르기만 하면서 스스로 선택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원치 않는 결과에 원망하기도 한다.


동물은 자립할 나이가 되면 부모의 곁을 떠나지만 인간은 자립은커녕 캥거루족과 같은 신조어가 낯설지 않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로부터 자립하질 못한다. 자립할 기회들을 대신 해결해줬으면서 생존력 없는 자식을 나무라기도 하고 다른 집 자식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다들 피해자다.


난 이 현상을 효도 증후군이라 부르기로 했다.

부모나 자기 자신을 위해 정성을 기울여 부모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나 부모의 요구에 못 이겨 의식적으로 효도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했고 증상도 적당히 나열해보았다.


하나, 사랑받기엔 내가 아직 부족한 것 같다.


둘, 부모님이 다른 집 딸내미, 아들내미 얘기하면 비교당하는 것 같고 불편하다.


셋, 지위, 차, 능력을 자랑하고 싶고 나보다 열악해 보이는 사람을 위안 삼는다.


넷,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진로, 결혼 등)을 하기 어려운 것이 나의 용기 부족인지 부모님 때문인지 헷갈린다.


다섯, 주변에서 효자 효녀라고 칭찬하는데 좋아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이 증후군의 가장 큰 단점은 나를 사랑하는 것, 더 나아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부모와 타인의 기준에 맞춰 효도하고 잘 살고자 하면 늘 부족한 상태에 머무른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은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고백을 했을 때 '대체 날 왜 좋아해? 어떤 점이?'라고 놀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기보다 그들에게 대하는 내 모습과 보이는 내 모습에 집중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이라고 포장했던 것들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보다 내 욕심과 이익에 더 가까웠다.


내가 보고 싶으니까, 걱정되니까, 불안하니까, 주고 싶으니까 주는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내 욕심을 해소하기에 급급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몰랐던 것이다.


난 결국 남들 의식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부모님께 배웠고, 그로 인해 의식하며 사는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배웠으며 나를 사랑하는 방법과 내 가치에 대한 판단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않는 방법 또한 배웠다.


어쩌면 자식이 더 잘 살길 바라신 부모님의 마음만은 전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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