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서관에서 만난 한국 책 여행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라는 드라마를 만난 후, 나는 그립지만 잊고 있었던 친구를 찾아 나섰다.
얼마 전 종영된 tvN의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악인 없는 착하고 건강한 드라마라서 좋았다. 그 드라마는 참 예쁘고 따뜻한 대사와 함께 사람들이 캐미가 살겠나 우려했던 주인공 이나영과 이종석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를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어쩌면 저렇게 썼을까 싶게 맛깔나고 마음에 닿는 대사와 실감 나는 출연자들의 열연은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나의 마음에 기분 좋은 무엇인가를 선물해주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내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거나 드라마 속의 말과 글을 음미하면서 오리털 이불을 덮은 듯 가볍지만 따뜻한 느낌에 빠져 지냈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나에게 기억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특별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다. 바로 ‘책을 쓰는 사람들’과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래전 ‘책을 읽던 삶’ 속에서 누렸던 ‘책을 읽던 시간’에 대한 아득하고 아련한 그리움을 떠올리게 했다.
가족이 생기고 아이들을 챙기느라 멀어진 책과의 거리는 스마트폰과 아이패드가 내 삶에 들어오면서 단절되었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시간이 있음에도 종이가 아닌 화면을 읽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무엇인가를 클릭하거나 터치하면서 읽어내는 삶의 패턴은 글을 읽는 나의 습관도 바꿔놓았다. 책장을 넘기며 마음에 닿는 문장에 줄을 긋거나 작가의 생각이 담긴 문장을 되새김질하는 대신 빠르게 훑고 알아서 이해한 뒤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다 눈에 드는 다른 정보나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에 쉽게 빨려 들어갔고 방금 화면에서 읽은 것들은 마음이나 생각 속에 머물지 못하고 어느새 스쳐 지나갔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연기자들이 설레는 표정으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단이와 은호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책을 읽던 시간’이 그리워졌다.
사실 내가 ‘책을 읽던 시간’을 처음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일 년 전쯤 같은 방송사에서 방영된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드라마를 보던 때였다. 드라마 제목처럼 드라마의 이야기는 드라마 속 인물들의 생각이나 감정 또는 상황을 대변하거나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좋은 시들로 연결되곤 했다. 출연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읽어지는 시를 들으며 화면의 시를 따라 읽을 때면 아주 오래전 사랑이 무엇인지도 채 알지 못하고 삶의 의미가 어떠한지를 채 경험해보지도 못한 어린 소녀가 사랑과 인생을 다 아는 양 십 대의 감성으로 충만해 시집을 읽고 옮겨 적었던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그 드라마 덕분에 서점에서 신중하게 시집을 골라 읽고 또 읽던 시간을 추억하며 집에 남아있는 몇 권 안 되는 시집을 뒤적여보기도 했다. 그러나 잠깐 시집의 향수에 젖었던 나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책이 아닌 화면을 통해 무언가를 읽은 삶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나에게 다시금 잊혔던 ‘책을 읽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 것이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라는 드라마였다. 이번에는 그 그리움을 놓치지 말고 잊고 있었던 오래된 친구인 책을 찾아가 보자고, 그 친구를 펼쳐서 인쇄된 저자의 생각을 읽어나가는 ‘책 읽은 시간’을 가져보자고 마음먹었다.
미국에 와서 영어 실력을 늘려보려고 영어 서적을 몇 권 읽기는 했지만 문장을 이해하고 해석하기에 바빠 그 책에 담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고 느끼기에는 내 역량이 부족했다.
‘책 읽는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날, 나는 가끔 도서관에서 지나치며 보았던 한국 서적들을 떠올렸다. 처음 미국 도서관에서 한국 서적을 발견했을 때 ‘미국 도서관에 기증된 한국 서적이 이렇게 많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사는 지역은 한국인들이 적지 않아서 그런지 어떤 도서관에는 심지어 한국어로 된 만화책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책들을 빌려 읽을 만큼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여유가 생겼을 때는 책이 아닌 화면으로 보고 읽는 삶에 빠져있었다.
다시 책을 읽어보리라 마음먹은 어느 날 퇴근길, 날씨가 너무 좋았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에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한편에 일본어나 중국어로 된 외국 서적이 꽂힌 책꽂이들 사이에서 한국 서적 칸을 찾은 나는 서서 책 제목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책 몇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웠지만 멀리했던 오랜 친구들을 조수석에 싣고 돌아오는 길, 그중 한 권의 표지도 펴지 않았는데 벌써 다 읽은 듯 뿌듯함이 밀려왔다. 화면이 아닌 종이에 인쇄된 생각과 이야기들을 다시 읽을 생각을 하니 즐거운 소풍이라도 가는 양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 날, 집안일을 마친 나는 휴대전화의 인터넷을 클릭하는 대신 그중 한 권을 골라 책장을 폈다.
방에 들어온 남편이 말했다.
"오늘은 드라마 안 봐?"
책에 눈을 둔 채 내가 말했다.
"나 이제 다시 책을 읽는 사람이 될 거야."
그렇게 나는 그리움을 넘어서 ‘책을 읽는 삶’ 속에서 누리는 ‘책을 읽는 시간’을 향해 다시 첫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