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첫 아이에 이어 둘째까지 멀리 있는 대학에 보낸 뒤 허전한 빈둥지에서 허전함도 감사한 빈둥지족의 시간에 적응하고 있다.
얼마 전 둘째가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학으로 떠났다. 내가 "Empty nester" 즉, 빈둥지족이 되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자녀들이 먼 지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독립해서 집을 떠나서 부모만 남은 가정을 빈둥지라 부르는 것처럼 미국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한다.
미국의 서부에 살면서 딸에 이어 아들까지 비행기를 갈아타야 갈 수 있는 미국 동부에 있는 학교로 보내고 나니 허전함과 서운한 감정의 파도가 수시로 밀고 들어오곤 한다. 하지만 그 파도가 물러나면 이제 내 임무를 완수했으니 나는 자유라는 뿌듯한 홀가분함이 찾아들기도 한다. 한 때 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사랑으로 키운 자녀가 어엿한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나가 둘이 되어 셋이나 넷 또는 다섯이 되었다가 다시 둘이나 하나로 돌아오는 것이 보편적인 가족의 모습이라 믿었다.
그러나 특수학급에서 장애아들과 부대끼며 살면서, 독립을 하는 자녀를 가진 부모가 되는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반 학부모들 중에는 평생 "Empty nester"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신체 발육과 신분증의 숫자만 성인일 뿐 여전히, 어쩌면 자신들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때가 다가온 뒤에도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자녀들을 둔 그들에게 "Emty nest"에서 경험하는 홀가분한 시원섭섭한 감정은 그저 사치일 수밖에 없을 것임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나는 내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찾아 나아가는 것에 대한 소감을, 나는 "Empty nester"가 되었다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평생 독립할 수 없는 자녀를 둔 부모들 앞에서 자녀의 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은 너무 잔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품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기만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은 모든 부모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님을, 매일 아침 두 아이가 떠난 빈 집에서 학교로 출근할 때면, 우리 반 아이들의 귀가를 배웅한 뒤 빈 집으로 돌아올 때면 생각한다.
부모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르게 되는 빈둥지에 절대 다다를 수 없는 이들에게 어쩌면 부모라면 당연하게 가질 수 있는 그 복과 특권은 행운일 뿐일 것이므로. 그런 행운을 누리는 나는 비어버린 둥지에서 느끼는 허전한 자유에 감사하다 말하기조차 송구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떠난 허전함과 섭섭함에 슬픔을 곱씹기보다 나에게 주어진 두 아이가 나를 떠나 독립할 수 있는 소중함에 아주 깊이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