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요리하는데 능숙해서 얄미운, 박쥐스러움도 귀여운 아이
서툰 영어로 자신의 삶에 끼어든 한국인 아줌마를 노골적으로 무시해준, 그렇지만 사탕 하나에 웃어주던 아직은 어린 5학년 멕시칸 아이 K의 이야기
대부분의 남다른 아이들이 내가 자신들 영역에 있어도 되는지 조심스레 살펴보던 첫 출근 이틀간, 까만 곱슬머리를 왁스로 멋들어지게 넘긴 통통한 멕시칸 아이 K는 나에게 부담스럽도록 무척 친절했다. 내가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듯하면 어느새 쪼르르 달려와 요목조목 소상히 이야기를 해주다가 Ms. R에게 지적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사흘 째 아침, 그 친절하던 K의 태도가 돌변했다. 내가 말한 것을 들은 것이 분명한데 내가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영어 수업 시간에 읽기와 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K를 도와주려는데, 내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다른 보조교사에게 그것에 대해 물었다. 수학 시간에는 꾀를 내는 데는 빠르지만 수학 연산에 부진한 K가 연산능력이 뛰어난 W의 답을 몰래 베끼기에 스스로 생각해보라며 지적했더니,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No”라고 말하고는 계속 답을 베껴 썼다. 꿀밤 한 대 딱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깊게 한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흠, 그래 이제 네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내가 휩쓸리면 안 되지. 너 또한 남다른 아이라 여기 있는 거지.’ 이틀 동안 친절함을 가장하여 속된 말로, 나를 '간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다른 아이들의 학습 의욕이 떨어지거나 감정조절이 안될 때 달래고 얼르기 위해 Ms. T가 작은 젤리나 과자를 슬쩍슬쩍 사용하는 것을 보고 나도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젤리류를 사서 가져간 날, 할 일을 하는 척하면서 항상 교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움직임을 추적하고 참견하는 K의 레이더가 그 젤리를 발견했다. 방금 전까지 나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던 K의 얼굴이 갑자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을 때 사용하는 천진한 꼬마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큰 덩치가 갑자기 입술을 쫑긋거리며 순진함과 해맑금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를 내며 나에게 눈웃음쳤다. “Excuse me, Ms. P. Can you help me?” 지난 며칠 틈틈이 자신이 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툭하면 못되게 굴며 힘의 줄다리기를 하던 K의 돌변한 모습에, 나는 속으로는 ‘무슨 속셈인가’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짐짓 모른척 친절을 가득 담아 “What can I do for you?”물으며 K에게 다가갔다.
K가 Chrome book 화면의 곱셈 문제를 가리키며 잘 모르겠다기에 책상 위의 곱셈표에서 해당 연산 칸을 짚어주었더니 그 동그란 눈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 “Ah~ha, Thank you.”라며 답을 넣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내가 젤리 둔 곳을 가리키며 “Can I have one?” 하고 물었다. ‘아, 그게 네가 돌변한 이유로구나!’ 단어 공부 때 오늘 할 것을 다 끝내면 받을 수 있다고 하자 만족한 듯 웃으며 말했다. “OK, Thank you.”. 단어 공부시간에 그 젤리를 얻기 위해 내가 시키는 것을 엄청 열심히 하는 척하더니 K는 젤리를 하나 입에 넣고 신이 났다. 그래, 네가 아직은 5학년 아이지.
이틀 간의 친절 후 무시하는 듯한 퉁명스러운 태로로 일관하던 K는 그 후 사탕이 먹고 싶을 때 혹은 나도 모르는 어떤 이유로 나에 대한 호감이 생길 때 갑작스럽게 애교를 부리며 다가오다가 다시 퉁명스러워지는 K 버전의 밀당 모드에 돌입했다. 지켜보니 그것은 나에게만이 아닌 다른 보조교사 심지어 Mr.R에게도 박쥐처럼 아주 민첩한 레이터를 작동시키며 수시로 밀당 작업을 했고 그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다른 교사들처럼 나도 K의 그런 모습에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며, 또 적당히 거리를 두며 휘둘리지 않자 K만의 밀당도 점점 시들해졌지만 여전히 은근히 얄미운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K의 남다름을 이해하고 용납하기로 마음먹었고, 가끔 알면서 모른 척 K의 전략에 비위를 맞춰주었다. 나와 다른 보조교사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내어 사람들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K의 박쥐스러움을 그 만의 남다른 삶의 전략으로 귀엽게 여겼다.
어쩌면 누구보다 민첩하고 예민한 레이다로 상황을 파악하고 그것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K의 전략은 자신의 부족함을 덜 드러내면서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 필요한 K만의 삶의 기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부족함을 조금은 가려주는 방패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K는 남다른 5학년 아이들 중 졸업식을 가장 기다린 아이였다. 매일 중학교에 가서 사용할 새로운 학용품을 가져와서 보여주며 으스대던 K는 졸업식 후 열 명도 넘는 친척들이 와서 축하하며 전해준 풍선과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기대감 가득한 모습으로 학교를 떠났다. K가 친적들에 둘러싸여 멀어지는 모습 위로 풍선들이 둥실둥실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