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1

푸른 바다

by 윤슬


낮의 나는 견고했다. 대학 강의실에서는 누구보다 진지한 학생이었고,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의 안색을 살피는 딸이었으며, 동생의 학비를 걱정하는 든든한 누나였다. 아빠가 보던 그 낡은 지도를 들고 가족의 앞날을 개척해야 했던 나는,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고 가족들이 잠든 뒤, 내 안의 억눌린 무언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면 나는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내가 향한 곳은 지독한 소음과 독한 술 냄새가 진동하는 클럽이었다. 그곳은 나에게 유흥의 장소가 아니라, 유일한 '탈출구'였다. 클럽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심장을 울리는 베이스 비트 속에 몸을 맡기면, 비로소 나는 '가장'이라는 무거운 껍질을 잠시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혹은 이 땅에 온 이후 처음으로 '여자'로서의 나를 마주했다. 낮에는 서툰 영어를 하는 동양인 이민자, 혹은 빵집 알바생으로만 존재하던 내가 그곳의 화려한 불빛 아래서는 누군가의 시선을 사로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성들의 주목과 관심. 그것은 지독하게 굶주려 있던 내 자존감을 채워주는 아주 달콤한 독이었다. 그들의 눈길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불쌍한 장녀'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사람으로 비치고, 그들의 관심을 받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이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중독자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알싸한 마비와 묘한 설렘이 간절했다. 그것은 비명이자 숨구멍이었고, 살기 위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모순된 기도였다. 24시간 내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살아야 했던 내가 부러지지 않기 위해 선택한 비겁하고도 절박한 이완. 그 소음의 소용돌이 속에 나를 내던짐으로써, 나는 역설적으로 다음 날 아침 다시 '결함 없는 장녀'라는 무거운 갑옷을 입을 동력을 얻었다.


해 뜰 녘, 클럽 문을 열고 나오면 서늘한 새벽 공기가 내 뺨을 때렸다. 옷에 밴 담배 연기와 술 냄새를 털어내며 집으로 향하는 길은 기분이 묘했다. 허무함이 가슴 한구석을 훑고 지나갔지만, 그 끝자락에는 지독하리만치 선명한 쾌감이 매달려 있었다. 세상이 내게 강요한 ‘착한 딸’과 ‘단단한 가장’이라는 배역을 몰래 찢어버리고 도망쳐 나온 탈주범의 희열, 그리고 누군가의 시선 끝에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는 그 아찔한 해방감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무엇도 다 좋고 다 나쁜 건 없다는 바다의 가르침처럼, 나의 방황 역시 나를 망가뜨리려는 행위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나는 그렇게 소음과 침묵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하며, 그 시간의 긴 터널의 끝을 향해 조금씩 기어가고 있었다.


스물일곱,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어른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남자였다.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 나를 압도한 것은 낯선 이방인의 공기보다, 그의 키였다. 유난히 큰 키와 완강하게 벌어진 어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성벽 같아서, 그 뒤에 서 있으면 세상의 어떤 풍랑도 나를 비껴갈 것만 같은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하지만 나를 진짜 무너뜨린 것은 그 단단한 골격 위에 박힌 그의 눈동자였다. 갓 길어 올린 심해의 물빛을 닮은 그의 푸른 눈은, 투명하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가 나를 응시할 때면, 나는 마치 그 깊고 고요한 바다 밑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 한구석에 비 내리는 바다 한 조각이 남아 있는 건,

아마도 그날 나를 읽어내던 그의 푸른 눈빛 때문일 것이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