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그곳의 불빛은 지나치게 밝았고, 음악은 고막을 찢을 듯 강렬했다. 하지만 그 과잉된 감각들이 오히려 내 안의 텅 빈 구멍을 메워주는 것 같아 나는 매일 밤 그 소음의 숲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 불확실한 조명 아래서, 나는 '그'를 만났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내가 빵집에서 밀가루 포대를 나르는지, 아빠가 사라진 집에서 지도를 펼쳐 낯선 길을 찾는지, 혹은 동생의 학비를 계산하며 밤잠을 설치는지 그는 알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음악 소리에 묻혀 귓속말로 건네는 가벼운 농담과, 내 잔을 채워주는 그의 따뜻한 손길만이 실재할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은 지독하게 낯설고도 아찔한 경험이었다. 그 아득한 시간 동안 나는 늘 앞장서서 바람을 맞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고 동생의 앞길을 터주느라, 정작 내 어깨에 쌓인 먼지를 털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당연하다는 듯 내 외투를 받아주고, 복잡한 인파 속에서 내 손목을 잡아 끌어주었다. 이 사람은 내 이민 생활의 첫, 아니 내 생애를 통틀어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가까이한 이성이었다. 남들은 열일곱, 열여덟에 겪었을 그 풋풋한 설렘을 나는 이 낯선 땅의 소음 속에서 뒤늦게, 그리고 지독하게 앓았다. 처음 느껴보는 타인의 체온, 나를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 그리고 오직 나만을 향한 관심. 그 모든 것이 생경해서 나는 그와 마주할 때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괜찮아? 피곤해 보이는데."
그 짧은 걱정 한마디에 나는 무너질 뻔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나의 고단함을 그가 너무나 쉽게 읽어버린 것 같아서. 그의 관심은 가뭄 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던 내 마음에 스며드는 빗줄기 같았다.
나는 그 달콤한 온기에 취해, 잠시나마 내가 짊어진 '가장'이라는 완장을 떼어놓고 싶었다.
우리는 클럽의 소음에서 벗어나 바닷가 근처를 걷기도 했다. 낮의 바다가 나를 집어삼키려던 푸른 우울이었다면, 그와 함께 걷는 밤의 바다는 검은 장막처럼 우리의 비밀을 덮어주었다. 그는 내게 한국에서의 추억을 묻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거창한 약속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체온에만 집중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늘 발걸음보다 심장 소리가 앞섰다. 그것이 사랑인지, 혹은 그저 어린 방황인지 가늠할 여유조차 없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집을 빠져나와 훔쳐온 그 짧은 시간은, 마치 내가 우리 가족의 평온을 야금야금 도둑질해 온 것만 같아 내내 뒤를 돌아보게 했다. 집으로 돌아와 내 옷가지에 엉겨 붙은 담배 연기와 차가운 밤공기가 엄마와 동생의 얼굴 위로 내려앉은 정적을 마주할 때면 드디어 찾아온 평안함을 더럽히는 이질적인 흔적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찰나의 숨을 쉬러 나갔을 뿐이었지만, 돌아와서는 마치 이 집의 '평화'에 돌이킬 수 없는 금을 내려고 들아온 은밀한 침입자처럼 나의 일탈을 매 순간 검열하며 스스로를 죄어오고 있었다
"너는 참 단단한 사람 같아."
그가 내게 건넨 칭찬은 사실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말이었다. 단단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세월을 그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조차 온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 채, 언제든 다시 무거운 갑옷을 입고 전쟁터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와의 만남의 시작은 나를 치유함과 동시에 나를 더욱 깊은 고립으로 밀어 넣었다. 가족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 더 늘어날수록, 나는 그만큼 더 지독한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음 속에서 찾은 그 조각 같은 온기는, 내가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유일하고도 슬픈 징표였다.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온 파도와 같았다.
단단하게 모래성을 쌓고 그 뒤에 숨어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너무나 쉽게 내 마음의 경계를
넘어 들어왔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나는 더 이상 지도를 펼쳐 길을 찾아야 하는 길잡이도, 동생의 학비를 계산하는 회계사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의 다정한 시선 아래서 수줍게 피어나는,
이름 그대로의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