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삶이 이토록 달콤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숨을 쉴 때마다
"너무 좋다"
라는 말이 비눗방울처럼 입가에서 퐁퐁 터져 나오던 시절, 내 세상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의 눈빛은 깊은 바다처럼 차분하고 어른스러웠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툴게 단어를 고르고 있으면, 그는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내 눈을 맞추며 기다려 주었다. 그 인내심 있는 침묵이 나에게는 세상 그 어떤 유창한 영어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 그저 맛있는 것을 먹으면 눈이 커지고, 장난스러운 농담에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평범한 스무 살의 나로 봐주었다. 우리는 참 많이도 맞닿아 있었다. 걷는 내내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는데,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손등을 덮을 때마다 전해지는 묵직한 온기가 참 좋았다. 찬 바람이 훅 끼쳐오면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자기 코트 안으로 깊숙이 끌어당겼다. 그의 품속에서는 기분 좋은 비누 향과 옅은 체온이 섞여 났고, 등 뒤로 느껴지는 그의 규칙적인 심장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장가 같았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이토록 마음을 놓아본 적이 있었을까.
그동안 버겁게 느껴졌던 삶의 무게에 짓눌려 단단하게 굳어있던 내 어깨가 그의 품 안에서만큼은 말랑말랑하게 풀어졌다. 살결이 맞닿을 때마다 전해지는 다정한 전율은, 내가 더 이상 누군가를 지탱해야만 하는 무거운 ‘기둥’이 아니라 사랑받고 보호받는 ‘한 사람’임을 일깨워주는 가장 확실한 증명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정말이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내 손을 꽉 쥐어줄 때면 내 안에 숨어있던 용기들이 기지개를 켰고, "괜찮아, 천천히 해"라고 툭 던지는 한마디에 세상의 모든 문이 나를 향해 열려 있는 듯한 전능감이 차올랐다.
사랑은 나를 안주하게 만드는 안식처인 동시에,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밀어 올리는 가장 강력하고 싱그러운 엔진이었다.
그를 만나는 시간만큼은 내 인생의 악보에 찍힌 가장 다정한 쉼표였다. 매일같이 반복되던 대학 강의와 아르바이트, 그리고 집안의 무게라는 단조롭고 무거운 저음의 연속에서, 그는 불쑥 나타나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려주는 변주곡 같았다. 우리는 대단한 곳을 가거나 화려한 이벤트를 즐기지 않았다. 그저 그가 운전하는 낡은 차를 타고 이름 모를 언덕에 올라가 지는 해를 바라보거나, 동네 작은 카페에서 마주 앉아 각자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내가 굳이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인가, 유독 일에 지쳐 어깨가 무거워 고개를 들 수조차 없던 날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깊게 나를 안아주더니, 내 손바닥을 자기 뺨에 가만히 갖다 댔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그 짧은 한마디는 그 어떤 긴 격려보다 내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는 내가 집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얼마나 큰 책임을 지고 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내 눈빛만으로 내 고단함을 읽어내는 성숙한 사람이었다. 사랑은 나를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에 감동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가 내 신발끈을 다시 묶어주는 뒷모습, 식당에서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기억하고 먼저 주문해주는 섬세함, 그리고 길을 걸을 때 항상 나를 안쪽으로 세우고 걷는 그 듬직한 습관들. 그런 배려들이 쌓여 내 안의 거친 방어기제들을 하나둘씩 허물어뜨렸다.
"너와 있으면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언젠가 내가 수줍게 건넨 고백에 그는 그저 내 코끝을 살짝 건드리며 웃어 보였다. 그 맑은 웃음 하나로 나는 내일 다시 마주할 세상의 거친 파도를 견뎌낼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