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바다
우리는 동생의 진로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생존을 위해 또 한 번의 이주를 결정했다. 이번에 택한 곳은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대학교가 있고, 무엇보다 집값이 저렴한 바닷가 근처의 작은 도시였다. 그곳의 바다는 내가 평생 본 적 없는 압도적인 푸름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새로운 도시는 한인들이 드물었다. 우리를 가십거리로 삼던 시선들로부터 멀어지자, 엄마의 얼굴에도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15kg이나 빠져 뼈만 앙상했던 엄마의 볼에 조금씩 살이 올랐고, 구부정했던 허리가 조금씩 펴졌다. 타인의 입방아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야 엄마는 비로소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바다는 지친 내 영혼을 보듬어주는 거대한 품이었다. 답답함이 차오를 때면 나는 무작정 바닷가로 달려가 수평선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나 너무 힘들다!"
"나도 살고 싶다!"
거친 파도 소리는 내 비명을 너그럽게 삼켜주었고, 차가운 바닷바람은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 푸른 파도를 보며 매일 조금씩 성장했다. 결국 나에게도 기적이 찾아왔다. 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나서야, 나 역시 드디어 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빵 봉투 대신 전공 서적을 손에 쥐었을 때, 나는 남반구의 하늘 아래서 처음으로 내가 이 땅의 일원이 되었다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우리는 그렇게 아빠 없는 생활에 서서히 적응해 나갔다. 집안에서 아빠의 이름은 더 이상 불리지 않는 금기어가 되었다.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세 식구였던 것처럼 행동했고, 서로의 기억 속에서 아빠의 조각들을 의도적으로 지워나갔다. 하지만 그 단단한 망각의 성벽도 특정 날이 되면 무너져 내리곤 했다. 아빠의 생일, 혹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그날이 다가오면 엄마는 어김없이 다시 앓아누웠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거나,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닷가에 나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의 그 푸른 위로조차 엄마의 마음속에 남은 지독한 흉터까지는 지워주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가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우리 가족이 짊어진 이 이민의 무게가 언제쯤 가벼워질 수 있을지 가늠해 볼 뿐이었다. 아빠 없는 평화는 그렇게 매번 엄마의 아픈 침묵 속에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바다는 매일 다른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어떤 날은 부드러운 거품으로 발등을 간지럽혔고, 어떤 날은 집어삼킬 듯한 포효로 내 안의 응어리를 대신 터뜨려 주었다. 그 압도적인 푸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쉬는 법을 다시 배웠다. 바다는 나에게 가장 값싼 치료제이자, 가장 거대한 상담가였다. 지금도 바다를 보면 마음 한구석이 눅눅하게 풀리며 안도감이 차오르는 건 그때 받은 지독한 위로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다는 양날의 검이었다. 어느 날은 끝도 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푸른 심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기묘한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파도는 나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모든 고통과 책임, 그리고 아빠의 부재라는 무거운 짐을 저 깊은 물속에 던져두고 나 자신마저 그 투명한 푸름 속으로 녹아버리고 싶다는 유혹. 그것은 공포라기보다 차라리 달콤한 안식처럼 다가왔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푸른색'이 사실은 우울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것을.
'Blue'
라는 단어가 지닌 이중성처럼, 나를 치유하던 그 색채는 동시에 나를 깊은 침잠의 늪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잔인하고, 너무나 평화로워서 오히려 위태로운 공간. 바다는 나를 살게 했지만, 동시에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서 있는지를 매 순간 확인시켜 주었다. 세상에 온전하게 좋기만 한 것도, 온전하게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 푸른 파도를 보며 깨달았다. 나를 보듬어준 바다는 언제든 나를 삼킬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이민의 시간은 역설적으로 나를 단단한 어른으로 빚어내고 있었다. 그 무엇도 정답은 없었다. 나는 그저 매일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내 안의 우울과 치유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며 견뎌낼 뿐이었다.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그 푸른 우울을 발밑에 둔 채 다시 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짙어지듯, 나의 성장 뒤에는 언제나 그 푸른 바다의 서늘한 유혹이 함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