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마트 계산대 앞에서 "Thank you"라는 짧은 인사조차 입안에서 굴리며 망설이던 아이였다. 하지만 아빠가 떠나고 침묵이 집안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더 이상 망설일 여유조차 허락받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 열아홉. 한국에 있었다면 수능 점수에 울고 웃으며 대학 축제를 꿈꿨을 나이. 하지만 남반구의 낯선 땅에서 나의 열아홉은 전혀 다른 단어들로 채워졌다. 나는 장녀였고, 실질적인 가장이었으며, 엄마의 입이 되어주는 통역가였다. 무엇보다, 예전에는 아빠가 운전석 옆자리에 펼쳐놓고 보던 그 낡은 지도를 이제는 내가 손에 쥐고 길을 찾아야 하는 우리 가족의 유일한 길잡이였다. "이거 가서 물어보고 와. 전기세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엄마가 내미는 고지서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지였다. 나는 사전을 뒤적여 예상 질문을 뽑고,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발음을 연습한 뒤에야 관공서 문을 두드렸다. 아빠의 손때가 묻어 꼬질꼬질해진 지도를 펼쳐 들고 낯선 길을 찾을 때면, 종이 위에 남은 아빠의 흔적이 내 어깨를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의 영어가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으면 당장 우리 집의 전기가 끊겼고, 내가 지도를 잘못 읽는 찰나 이 거대한 이방의 도시는 우리 가족의 존재를 통째로 지워버릴 것 같은 무채색의 미로가 되었다. 하지만 나를 진짜 무너뜨렸던 공포는 내 발밑에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아빠가 사라진 그 텅 빈 자리에, 혹여 엄마마저 우리를 남겨두고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그 서늘한 의심이 1분 1초도 쉼 없이 나의 숨통을 파고들었다.
그 실체 없는 무의식은 나를 기어이 '무조건적인 순종' 이라는 유리 벽 속에 가두었다. 사실 나는 본래 그런 착한 딸이 아니었다. 내 안에는 날카로운 가시와 제멋대로 타오르고 싶은 불꽃이 가득했다. 하지만 버려지지 않기 위해, 나는 스스로 그 가시를 꺾고 불꽃을 잠재웠다. 기꺼이 엄마의 가장 유순한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하며, 나는 그렇게 나의 본성을 지워낸 대가로 하루치의 위태로운 평온을 얻어내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오로지 오늘 저녁 식탁에 올릴 식재료의 가격과, 가야 할 관공서의 위치, 그리고 아빠 없는 빈자리를 어떻게든 메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득 찼다.
유일한 숨구멍은 한국 친구들과 주고받는 편지였다. 편지 봉투를 뜯으면 그 안에서 한국의 종이 냄새와 익숙한 잉크 향이 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편지들은 나를 위로하는 대신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나 이번에 어느 대학 붙었어! 과팅은 어떤지 알아? 수능 끝나니까 너무 허무하다.' 친구들의 글자 속에는 내가 가질 수 없는 '평범한 미래'가 가득했다. 그들은 대학 입시와 전공 선택을 고민했지만, 나는 오늘 밤 우리 집 강아지 사료를 살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들의 고민은 너무나 가벼워 보였고, 나의 현실은 너무나 비대해서 더 이상 공감이라는 다리를 놓을 수가 없었다. '너희는 좋겠다. 대학 걱정만 하면 되어서.' 답장을 쓰려다 펜을 놓았다. 내가 느끼는 이 지독한 고립감과 어깨를 짓누르는 생존의 무게를 그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의 대학 이야기가 더 이상 부러움을 넘어 증오에 가까운 슬픔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결심했다. 나는 책상 서랍 깊숙이 보관해두었던 친구들의 편지를 모두 꺼냈다. 그리고 더 이상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에서의 나, 열아홉 살의 평범한 소녀였던 나 자신과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어내는 의식이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아빠가 보던 낡은 지도와, 엄마의 수척한 얼굴,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할 오늘 하루뿐이었다. 연락을 끊어버린 뒤 찾아온 지독한 적막 속에서, 나는 비로소 진짜 이방인이 되었다. 친구도, 연애도, 꿈도 없는 열아홉의 가장. 나는 그렇게 남반구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서둘러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극 속에서도 역설적인 장점은 있었다. 나의 영어가 무서운 속도로 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돈이 없어 어학원을 그만둔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문법을 외울 때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던 단어들이, 당장 내일의 전기세를 걱정하고 관공서의 냉대를 받아내야 하는 실전 속에서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튀어 나갔다. 나에게 영어는 배움의 대상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생존 도구였다. 하지만 언어가 늘어갈수록 우리는 사람들과 더욱 멀어졌다. 우리 가족은 현지인뿐만 아니라 한인 커뮤니티와도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 좁고 말 많은 이민 사회에서 우리 가족은 너무나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 집 남편, 한국 가서 연락 두절이라며?" "그 여자, 살 빠진 것 좀 봐. 15kg이나 빠졌다던데,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 아니야?"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은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아빠의 행방을 묻는 무례한 질문들과 수척해진 엄마의 모습을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그들의 악의 없는 잔인함에 우리는 진저리를 쳤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성벽 안에 가두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지 않고, 누구와도 섞이지 않는 고립된 요새. 그것이 우리가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동생은 여전히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직 어린 동생만은 평범한 학생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열아홉의 나는 학생이 아닌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나는 집 근처 작은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도착한 빵집에서 나는 밀가루 포대를 나르고, 갓 구워져 나온 빵의 온기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돈을 벌었다. 빵집 안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했지만, 그 냄새가 나에게는 더 이상 낭만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빵 하나를 팔 때마다 들어오는 푼돈은 이제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는 강아지들의 사료값이 아니라, 우리 세 식구의 방세와 동생의 학비가 되었다. 이사 오며 결국 포기해야 했던 그 아이들의 빈자리는 지독한 적막으로 남았다. 좁은 집안에는 아이들의 발소리도, 꼬리를 흔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적막을 견디기 위해 나는 더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손님들에게 기계적인 미소를 지으며 "How can I help you?"를 내뱉는 나의 목소리는 제법 능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유창해진 영어만큼 내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갔다. 빵 봉투를 들고 나가는 행복한 얼굴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오직 집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글 시간만을 기다렸다. 친구도, 대학도, 방향도 사라진 나의 열아홉. 빵집의 밀가루 먼지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 어른이라는 딱딱한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빠가 없는 10년이라는 긴 터널의 입구에서, 나는 그렇게 가장 먼저 '나'를 지우고 '가장'이 되는 법을 익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