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지독한 시련 끝에 찾아온 여름은 늘 희망의 전령이었다. 주인공들은 찬란하게 쏟아지는 여름 햇살 아래서 새로운 사업에 성공하거나, 꼬였던 오해를 풀며 활짝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하지만 남반구의 여름은 우리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는데, 우리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학원의 레벨은 조금씩 올라갔지만, 그것이 곧 이곳의 일원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전히 마트 계산대 앞에서 나는 작아졌고, 아빠의 사업 구상은 번번이 높은 언어의 장벽과 낯선 법규 앞에서 무너졌다. 지독하게 푸른 하늘은 이제 우리를 비웃는 거대한 거울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한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어느 무더운 여름 저녁, 바비큐 연기 대신 무거운 침묵이 흐르던 식탁에서 아빠가 어렵게 입을 뗐다. 엄마의 젓가락질이 허공에서 멈췄다.
‘기러기.’
그 단어가 식탁 위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한국에서 이민 가방을 쌀 때만 해도 우리 사전에 없던 단어였다. 온 가족이 함께 있어야 힘을 낼 수 있다며, 40피트 컨테이너에 모든 삶을 실어 왔던 우리였다. 하지만 현실은 웅장한 집의 유지비와 생활비라는 이름으로 매달 우리를 조여왔고, 아빠는 결국 자신의 자존심을 깎아 가족의 생존을 지키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당신 혼자 가서 어쩌려고요... 애들이랑 다 같이 왔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엄마는 아빠가 혹시나 다시 한국의 그 치열한 직장 생활로 돌아가 혼자 밥을 차려 먹으며 우리에게 돈을 보내주는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을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눈치였다. 하지만 아빠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아빠가 들여다보고 있던 것은 식은 국그릇이 아니라, 가장으로서의 실패와 미안함이 뒤섞인 깊은 늪이었다. 여름의 열기는 밤이 되어도 식지 않았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지만, 거실에서 들려오는 부모님의 깊은 한숨소리 때문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이민이라는 거창한 꿈의 단단했던 표면 위로, 이제 막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할 불길한 서막이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이제는 살기 위해 헤어지는 법을 고민해야 했다. 웅장한 집의 거실은 그 어느 때보다 넓고 차갑게 느껴졌고, 나는 그 거대한 공간 속에서 우리 가족이 각자의 섬으로 흩어지고 있다는 공포를 느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여름 바다를 보며 환호했지만, 나는 그날 밤 꿈속에서 여전히 다리가 묶인 채 멀어져 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았다. 여름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가장 아픈 선택을 강요하는 잔인한 계절이었다. 아빠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 몇주가 지났다. 처음 몇 일간은 공항 공중전화나 지인의 휴대폰을 빌려 짧게나마 안부를 전해왔다. "잘 도착했다", "숙소를 구하고 있다", "곧 연락하마"라는 건조한 말들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남반구의 낯선 저택에 남겨진 우리 세 식구에게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하지만 2주가 지난 시점부터, 그 생명줄은 아무런 예고 없이 툭 끊어졌다. 집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엄마는 온종일 전화기 앞에 붙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전화만이 유일한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국제전화는 그야말로 돈을 허공에 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그건 안중에도 없었다. 아빠가 다녔던 회사의 옛 동료, 친척들, 심지어는 사이가 서먹했던 지인들에게까지 엄마의 목소리가 닿았다.
“형님, 그 사람 혹시 거기 안 갔나요? ...네, 아뇨, 연락이 안 돼서요.” “부장님, 죄송합니다 이 시간에. 혹시 저희 남편 소식 들으신 것 있으신지...”
수십 통, 수백 통의 전화를 돌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차가웠다. 아무도 아빠의 행방을 몰랐고,
누구도 아빠를 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한국이라는 거대한 땅속으로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 지독한 불안감은 엄마를 먼저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그렇게 애를 써도 빠지지 않던 엄마의 살이 보름 만에 15kg이나 빠져나갔다. 그것은 건강한 감량이 아니라, 영혼이 빠져나간 자리가 푹 꺼져버린 처참한 흔적이었다. 엄마의 광대뼈는 도드라졌고, 눈가는 휑하니 패어 있었다. 어느 밤,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것은 통곡이라기보다 짐승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거실 한복판에 주저앉아 전화기를 붙잡고 우는 엄마의 뒷모습. 웅장한 천장과 넓은 거실은 엄마의 슬픔을 증폭시켜 집 전체를 울리게 했다. 나와 동생은 차마 거실로 나가지 못한 채 방문 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를 안아주기에는 우리 역시 너무나 겁에 질려 있었고, 엄마의 그 깊은 절망을 감당할 힘이 우리에겐 없었다. “여보, 제발... 제발 전화 좀 받아...” 엄마의 애원은 응답 없는 수화기 너머로 흩어졌다. 이민이라는 거창한 꿈의 균열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협곡이 되어 우리 가족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남반구의 여름 밤은 지독하게 길었고,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오로지 엄마의 젖은 울음소리만을 이정표 삼아 버티고 있었다. 아빠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텅 빈 집의 냉기와, 15kg의 무게만큼 가벼워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엄마의 위태로운 그림자뿐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기적 같은 재회는 없었다. 그저 지독한 불통과, 그보다 더 지독한 침묵이 우리 집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잠깐 한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그 짧았던 문장이 우리 가족의 운명을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갈라놓을 줄은 그때 아무도 몰랐다. 몇주면 돌아올 줄 알았던 아빠의 빈자리는 계절이 수십 번 바뀌는 동안에도 채워지지 않았고, 남겨진 우리 셋의 이민 생활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우리를 설레게 했던 마당의 바비큐 연기는 어느덧 가장 사치스러운 기억이 되어버렸다.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던 저녁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유통기한이 임박해 할인하는 식재료들로 채워진 초라한 식탁만이 남았다. 우리는 이제 맛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먹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현지에서 입양했던 우리 강아지들이었다. 이 낯선 땅에서 우리 가족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우리를 이 땅에 조금이나마 뿌리 내리게 해주었던 아이들. 처음 입양했을 때만 해도 웅장한 마당을 뛰어놀던 그 맑은 눈망울이 우리 가족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이들의 사료값마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마트 사료 코너 앞에서 가장 싼 봉지를 들었다 놨다 하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입술을 깨물었다. 강아지들은 배고픈 기색도 없이 꼬리를 흔들었지만,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마주하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었다. 한때는 축복이자 거대한 감옥 같았던 그 넓은 공간도 이제는 포기해야 할 때가 왔다. 우리의 정착지였던 그 집, 잡초와 싸우며 눈물 흘렸던 마당, 아빠의 손때가 묻은 가구들. 그 모든 것이 담긴 공간은 이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부채가 되어 돌아왔다. 유지비와 세금, 그리고 아빠가 없는 빈 공간을 채우는 지독한 외로움. 엄마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여기는 이제 우리 집이 아니야. 더 작은 곳으로 가야 해."
엄마의 목소리는 15kg이나 빠져버린 몸처럼 가냘팠지만 단호했다. 우리는 그 넓은 집을 뒤로하고, 우리 몸을 겨우 누일 수 있는 작은 곳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한국에서 40피트 컨테이너에 가득 실어 왔던 '우리의 과거'들을 하나씩 팔아치우는 일이었다. 한국 집의 거실에 놓여 있던 소파, 내가 공부하던 책상, 엄마가 아끼던 서랍장까지. 그 가구들에는 한국의 햇살과 공기, 그리고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것들을 헐값에 중고로 내놓으며 나는 단순히 가구를 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낯선 이들이 우리 가족의 기억이 묻은 가구들을 하나둘 들고 나갈 때마다 집 안은 더욱 휑해졌고, 나의 세계는 그만큼 좁아졌다. 그때의 상실감이 얼마나 깊었는지,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가구를 고를 때면 본능적으로 그때 팔아버렸던 것들과 비슷한 디자인과 색감을 찾곤 한다. 무의식은 여전히 그 냄새와 촉감을 기억하며, 잃어버린 한국에서의 조각들을 현재의 공간에 채워 넣어 보상받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아빠가 떠난 뒤, 수화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한국의 소음은 커녕 아빠의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지독한 단절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빠가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어떤 사투를 벌였는지, 왜 그토록 긴 침묵을 지켜야만 했는지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막막한 세월 동안 우리는 아빠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진짜 민낯을 마주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다. 웅장했던 대문이 닫히고, 우리가 사랑했던 공간들과 한국에서의 냄새가 밴 가구들이 시야에서 멀어지던 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계절이 거꾸로 흐르는 이 땅에서, 우리의 시간 또한 거꾸로 흘러 가장 밑바닥까지 닿아버렸음을. 하지만 그 바닥에서 우리는 서로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화려한 집도, 익숙한 가구도 아니었지만,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셋의 지독한 의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