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북향 1

푸른바다

by 윤슬


그날은 4월 1일이었다. 이 먼 타국에 도착한 날이 하필이면 만우절이라니. 공항 문이 열리고 낯선 대륙의 공기가 훅 끼쳐올 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다 누군가의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나와 동생, 부모님까지 네 식구의 짐을 싣고 민박집으로 향했다. 차창 밖 풍경은 상상하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붉은 흙먼지가 날리는 길가 위로 끝없이 이어진 함석지붕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짙은 피부색의 사람들.


"정말 여기서 살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걱정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진한 파란색이었다. 척박한 지상의 풍경과는 딴판으로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투명하고 높았다. 아침 일찍 도착한 민박집에는 큰 수영장이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찰랑이는 물결 위로 파란 하늘이 담겨 있었다. 4월의 한국은 봄이었지만, 남반구인 이곳은 이미 가을이었다. 마당 구석구석 쌓인 낙엽들이 계절이 거꾸로 흐르는 곳에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침대보에서 빳빳하게 잘 마른 세제 냄새가 났다. 라벤더 향이었다. 낯선 곳에서 긴장한 우리 가족에게 그 깨끗한 냄새는 작은 위로가 됐다. 긴 시차 때문인지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우리는 라벤더 향이 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정신없이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나 처음 간 곳은 근처의 대형 쇼핑몰이었다. 밖에서 본 흙먼지 동네와는 전혀 다른 화려한 별세계였다. 거기서 우리 가족은 첫 끼니로 큰 새우와 생선구이를 먹었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엄마는 연신 웃으며 말씀하셨다.

"어머, 여기 해산물 정말 싱싱하고 맛있다!"

영어를 잘하는 아버지는 벌써 점원에게 말을 걸며 스몰토크를 나누느라 바쁘셨다. 키 큰 남동생도 듬직하게 앉아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시차 때문에 멍한 상태였다.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다 소동이 났다. 한국 욕실처럼 생각하고 샤워 커튼을 제대로 치지 않았는데, 바닥에 하수구가 없어서 물이 방 안까지 다 넘쳐버린 것이다.

"이게 웬일이니! 물이 왜 안 빠져?"

엄마의 비명 섞인 소리에 온 가족이 달려붙어 수건으로 물을 닦아내며 한바탕 진땀을 뺐다. 이곳이 정말 다른 세상이라는 걸 몸소 느낀 순간이었다. 저녁이 되자 마당으로 나갔다. 낮에 본 파란 하늘 대신, 평생 본 적 없는 무수한 별들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수영장 근처에서는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먼저 정착한 한국 사람들이 초대되어 왔는데, 적극적인 부모님은 벌써 그들과 섞여 질문을 쏟아내셨다. "차는 어디서 사는 게 제일 믿을 만할까요?" "내일은 어디를 먼저 둘러보는 게 좋을까요?" 동생은 그새 마당 테니스장에서 농구공을 튀기며 놀고 있었다. 그날 처음 먹어본 양고기는 참 맛있었다.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왁자지껄한 대화를 들으며 고기를 씹고 있자니, 천국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마음속으로 한마디가 나왔다.

'아, 이제야 정말 이곳에 왔구나.'


이민 이틀째 아침이 밝았다. 우리 가족은 전날 밤 바비큐 파티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곧장 집을 나섰다. 가장 급한 건 발이 되어줄 차를 구하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실행력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낯선 땅에 온 지 하루 만에 우리는 차를 한 대 샀다. 엄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색 같은 차를 골랐다.

"얘, 이거 한국에서 타던 차랑 너무 비슷하지 않니? 왠지 정이 가네."

신기하게도 운전대가 한국과 반대 방향이었는데, 엄마는 마치 오랫동안 몰아본 차처럼 금세 적응해 운전대를 잡으셨다. 거침없이 페달을 밟으며 낯선 동네의 길을 익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우리 엄마였다. 차창 밖을 내다봤지만, 거리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마침 부활절 휴가 기간이라 대부분의 상점이 아침 일찍 문을 닫고 오후에는 거리가 텅 비어버린 탓이었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오후의 정적. "아니, 다들 장사를 안 하는 거야? 벌써 다 닫았네?" 부모님은 당황하셨지만, 이내 이 나라의 느린 호흡을 받아들이기로 하셨다. 우리는 서둘러 몇 가지 생필품만 챙겨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할 일이 없어진 오후, 우리 가족은 자연스럽게 수영장 근처로 모여들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수영장 옆 선베드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민박집에서 키우는 독일 셰퍼드와 푸들이 꼬리를 흔들며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동생은 어느새 강아지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붉은 흙먼지와 시차 때문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는데, 따사로운 햇볕 아래 강아지들과 뒹굴고 있자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는 수영장가에 앉아 민박집 주인 부부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사장님, 여기서 집을 구할 때는 보통 어떤 걸 제일 먼저 봐야 하나요?" "계약할 때 주의할 점은요?" 어떤 집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쏟아지는 조언들을 들으며 우리는 이 낯선 땅에서의 진짜 '우리 집'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활절 오후의 강제적인 휴식이었지만, 그 고요한 시간 덕분에 비로소 우리는 이 땅의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실 수 있었다. 수영장 물결 위로 부서지는 햇살과 강아지들의 가쁜 숨소리. '여기는 원래 이렇게 여유로운 곳인가 보다.' 그렇게 우리의 이틀째는 뜻밖의 평화로운 오후와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부활절 휴일은 생각보다 길었다. 며칠째 반복되는 바비큐 파티와 수영장의 햇살, 그리고 강아지들과의 평화로운 시간. 하지만 그 여유로운 풍경도 사흘쯤 지나자 우리 가족, 특히 성격 급한 부모님에게는 일종의 고역이 되기 시작했다.


“여보, 이렇게 마냥 놀고만 있어도 되는 걸까? 4월 말이면 한국에서 보낸 이삿짐이 도착할 텐데.” 엄마의 목소리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이삿짐은 이미 태평양을 건너 꾸역꾸역 오고 있는데, 정작 그 짐을 받아줄 집이 아직 없었다. 자칫하면 방대한 짐들을 길바닥에 쌓아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정보를 얻을 곳이라곤 사람들의 입소문이나 두꺼운 종이 신문이 전부였다. 아빠는 아침 일찍 배달된 동네 신문을 펼쳐 들고 광고란에 볼펜으로 여기저기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하셨다. “여보, 여기 괜찮은 집이 하나 났네. 내가 지금 바로 전화해 볼게.” 아빠는 유선 전화기를 들고 광고에 적힌 번호를 하나하나 누르셨다. 영어로 집을 볼 수 있는지, 렌트비는 얼마인지 묻고 약속을 잡느라 오전 내내 전화기 앞을 떠나지 못하셨다. “응, 응. 아, 그래요? 그럼 오늘 오후에 좀 가봅시다.” 전화를 마친 아빠는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으셨다. 4월 말이라는 마감 시한이 우리 가족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이제는 구경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발붙이고 살 ‘진짜 우리 집’을 찾아내야만 했다. “자, 이제 우리 집 찾으러 가보자!” 아빠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바닐라 크림색 차가 민박집 대문을 나섰다. 엄마는 낯선 반대편 운전석에서도 능숙하게 차를 몰았고, 아빠는 조수석에서 커다란 종이 지도를 펼쳐 들었다. 복잡하게 얽힌 영어 길 이름들을 지도에서 짚어내며 아는 막힘없이 길을 안내하셨다. “여보, 다음 골목에서 우회전해요. 조금만 더 가면 나올 거야.” 신문지 속 활자로만 존재하던 집들을 마주하러 가는 길. 우리는 그렇게 지도 한 장과 부모님의 단단한 호흡에 의지해 낯선 동네의 골목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아빠가 펼쳐 든 종이 지도를 따라 도착한 첫 번째 집. 차에서 내린 우리 가족은 대문 앞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신문 광고의 짧은 글귀로는 결코 짐작할 수 없는 규모였다. “여기가 정말 우리가 보러 온 집 맞아요? 무슨 공원 같은데.” 엄마의 목소리에도 당황함이 섞여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마당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동네 집들의 대지 면적은 보통 2,000제곱미터, 우리 식으로 치면 600평이 훌쩍 넘는 크기였다. 한국에서 살던 집 몇 채를 합쳐도 이 마당의 절반조차 채우지 못할 것 같았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더 기막힌 광경이 펼쳐졌다. 거실 한복판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커다란 벽난로. 운치는 있어 보였지만, 정작 집 안 어디를 둘러봐도 한국식 보일러 같은 난방 시설이 전혀 없었다. “아니, 여긴 겨울에 어떻게 지내라는 거야? 이 넓은 집을 벽난로 하나로 견디라고?” 아빠의 물음에 집을 보여주던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게다가 더 큰 혼란은 '집의 방향'에서 왔다. 한국에서는 무조건 남향집이 최고라고 배웠는데, 이곳은 해가 북쪽을 지나가기 때문에

북향집을 찾아야 볕이 잘 든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한평생 믿어온 상식이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넓디넓은 부엌과 다이닝 룸 사이를 걸어보며 헛웃음을 지으셨다. “여기서 밥 퍼서 식탁까지 배달하다가 다 식어버리겠네.”

집이 너무 커서 동선조차 고역이 될 판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게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600평이나 되는 광활한 마당, 거꾸로 된 집의 방향, 그리고 덩그러니 놓인 벽난로까지. 우리가 알던 '좋은 집'의 기준이 이 낯선 땅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지 위에 서서 우리는 비로소 이 땅의 스케일과 법칙이 우리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던, 낯선 세계로의 진짜 첫발이었다.

지도와 신문을 들고 돌아다닌 끝에 우리는 엄청나게 큰 집 세 채 정도를 후보로 올렸다. 가는 곳마다 압도적인 규모에 입이 쩍 벌어졌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가는 한 군데를 마침내 골랐다. “여보, 이 정도 크기에 이 값이면 정말 괜찮은 거 아니에요?” 엄마의 말대로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비하면 렌트비는 생각보다 합리적이었다. 한국의 좁은 아파트 값으로 이런 대저택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고 좋았다.

처음에는 그 넓은 집에 난방 시설 하나 없이 벽난로만 덩그러니 있는 게 의아했지만, 곧 이유를 알게 됐다. 이곳은 겨울에도 기온이 10도 이하로 잘 내려가지 않는 남반구였다. 한국처럼 뼛속까지 시린 추위가 없으니, 벽난로 하나로도 충분히 겨울을 날 수 있다는 현지인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평생 보일러 온도를 올리며 겨울을 났던 우리에게는 참으로 낯설고도 반가운 기후였다. 가장 좋았던 건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잔디밭이었다. “여기서 강아지 키우면 정말 좋겠다. 그치?” 동생과 나는 벌써 마당을 뛰어다닐 강아지의 모습을 상상하며 신이 났다. 한국에서는 꿈도 꾸기 힘들었던 '600평 마당의 강아지'라니. 낯선 땅에서의 생활이 고생길이 아니라 마치 선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자, 이제 여기가 진짜 우리 집이다!”

아빠가 호쾌하게 선언하셨다. 4월 말이면 도착할 이삿짐을 넣을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그 넓은 공간이 가득 채워졌다. 비록 밥을 푸러 주방까지 한참을 걸어야 하는 북향집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넓은 잔디밭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우리는 이 낯선 땅에서의 진짜 첫 페이지를 넘기기로 했다.


드디어 4월 말, 한국에서 보낸 이삿짐이 도착했다. 집 앞에는 거대한 40피트 컨테이너가 자리를 잡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우리 가족은 모두 탄성을 내뱉었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상자들.

“어머, 이걸 우리가 다 어떻게 채워서 보냈대?”

엄마는 놀라면서도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셨다. 한국을 떠나기 전, 혹시나 몰라 이것저것 챙겨 넣었던 짐들이 3개월 동안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그때부터 온 가족이 달라붙어 짐을 풀기 시작했다. 짐을 푸는 데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상자 하나를 열 때마다 익숙한 냄새와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에서 쓰던 소파, 식탁, 그리고 소소한 주방 집기들까지. 낯선 타국에서 3개월 만에 다시 만난 물건들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친한 친구처럼 반가웠다. “아빠, 이거 우리 거실에 있던 시계잖아요! 아직 잘 가네.” “이 식탁 보니까 이제야 진짜 우리 집 같다.” 600평 집의 휑하던 공간들이 하나둘 한국의 온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비록 부엌에서 다이닝 룸까지 밥을 나르는 길은 여전히 멀었지만, 익숙한 우리 식탁이 그 자리에 놓이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일주일 내내 먼지를 뒤집어쓰고 짐 정리를 하느라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상자 속에서 나온 물건들을 하나씩 제자리에 놓으며 우리는 이 낯선 땅 위에 '한국의 조각'들을 정성껏 이어 붙였다. 40피트 컨테이너에 실려 온 것은 단순한 짐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5월이 되자 남반구의 가을은 더 깊어졌다. 한국의 5월과는 정반대로, 이곳의 하늘은 씻어낸 듯 투명해졌고 색깔은 전보다 훨씬 짙고 푸르러졌다. 600평이나 되는 우리 집 정원에도 낙엽이 비처럼 쏟아졌다.


넓은 잔디밭 위로 층층이 쌓인 낙엽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풍경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를 만큼 아름다웠다. 이삿짐 정리를 대강 마치고 난 뒤, 우리 가족의 일상은 바비큐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특별한 날에나 먹던 직화 구이가 이곳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모든 게 생소하고 신기했던 우리는 거의 매일 마당으로 나가 고기를 구웠다. “여보, 오늘도 마당에서 고기 좀 구울까? 불 피우는 재미가 쏠쏠하네.” 아빠는 어느새 능숙하게 숯불을 피우셨고, 엄마는 한국에서 가져온 양념들을 곁들여 풍성한 식탁을 차려내셨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고기 굽는 냄새, 그리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가을 별빛. 매일같이 이어지는 그 파티 같은 저녁 식사 덕분에 타국에서의 낯선 밤도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9월에 시작되는 새 학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당장 정규 학교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나와 동생은 우선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알아봐야 했다. “얘들아, 당분간은 영어 학원 다니면서 귀 좀 틔워야겠다. 아빠가 몇 군데 알아놨으니 내일 같이 가보자.” 아빠의 말에 나와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같이 고기를 구워 먹으며 천국 같은 가을을 즐기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이 나라의 삶' 속으로 들어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낙엽이 깔린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나설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이 낯선 땅의 언어와 속도에 익숙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문 광고와 주변 말만 믿고 찾아간 영어 학원의 첫인상은 기대와는 영 딴판이었다. 600평 마당의 평화로움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여기가 맞나?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학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멈칫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많은 외국인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낯선 언어로 자기들끼리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고, 그 활기찬 소음 사이에서 나는 순식간에 기가 눌리는 기분을 느꼈다. 교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의 그 서늘한 긴장감. 선생님의 빠른 발음과 옆자리 학생들의 거침없는 질문들이 나를 에워쌌다. 한국에서 나름대로 준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전은 전혀 달랐다. “어휴, 저 사람들은 영어를 왜 저렇게 잘해?” 옆에 앉은 동생도 나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낯선 외모와 목소리들 사이에서 우리는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신문 광고지 속 활자로 보았던 '친절한 영어 수업'은 간데없고, 거친 파도 앞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원 문을 나섰을 때, 5월의 차가운 가을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600평 잔디밭 위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즐겼던 그 '천국'은 잠시 잊어야 했다. “얘들아, 첫날이라 그래. 내일은 좀 나을 거다.” 아빠는 씩씩하게 말씀하셨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창밖의 푸른 하늘만 말없이 바라보았다. 낯선 땅에서의 삶은 낭만적인 바비큐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이 쏟아지는 타인의 언어 속으로 나를 던져야 할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 학원을 몇개월간 다녀보기로 했다. 매일 아침 부모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학원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문 앞까지 데려다주시는 부모님의 차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이동수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편안함은 서서히 답답함으로 변해갔다. 이곳은 차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든 곳이었다. 대중교통이 워낙 열악하다 보니, 모든 일정이 부모님의 운전대에 매여 있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시간을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씩 숨을 조여왔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다른 나라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어울려 어디론가 향할 때, 나는 부모님의 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학원 앞 계단에 앉아 있어야 했다. 혼자서는 슈퍼마켓 하나, 공원 한 번 편하게 나갈 수 없는 처지. 600평 집의 넓은 마당은 어느덧 세상과 단절된 화려한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 혼자서는 아무 데도 못 가는구나.’ 그전까지는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면, 이제는 하나둘 현실이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다. 언어의 장벽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이동의 제약까지. 부모님의 보호 아래 있는 안락함 뒤에는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숨어 있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던 바비큐 파티의 연기가 걷히고 난 자리에, 진짜 이민자의 삶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낯선 땅에서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며, 이 땅의 진짜 일원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이 얼마나 높은지 비로소 실감하고 있었다. 학원을 다닌 지 몇 달이 지나자, 매일 저녁 마당을 채우던 바비큐 연기도 서서히 일상의 풍경이 되어갔다. 처음의 그 들떴던 흥분은 가라앉고, 그 자리에 무거운 현실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눈빛도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여유로움을 즐기기엔, 앞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지에 대한 걱정이 너무나 컸다. “여보, 애들은 이제 학원에 좀 적응한 것 같은데... 우리는 이제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까?” 밤늦게 거실에서 들려오는 부모님의 낮은 목소리. 아빠는 여전히 종이 신문을 뒤적이며 구인 광고나 사업체 매물란을 살피셨고, 엄마는 가계부를 적으며 낯선 물가와 씨름하셨다. 한국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온 가족을 이끌고 온 결정. 그 결정에 대한 책임감이 부모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자식들이 낯선 언어와 환경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우리가 선택한 이 길이 정말 맞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 없는 질문들이 매일 밤 이어졌다. “얘들아, 공부는 할 만하니? 선생님 말은 좀 들리고?” 아침마다 우리를 학원에 태워다 주며 던지시는 부모님의 짧은 질문 속에는, 우리가 하루빨리 이 땅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부모님의 차를 타고 편안하게 이동하는 그 시간조차, 이제는 단순한 편리함이 아니라 부모님의 희생과 걱정 위에 올라타 있는 기분이었다. 천국 같았던 넓은 잔디밭도, 푸르기만 했던 가을 하늘도 이제는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았다. 낭만적인 이민자의 삶은 끝났다. 이제는 생존의 문제와 마주해야 하는 진짜 시간이 우리 가족 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남반구의 공기는 한국보다 맑았지만, 나를 누르는 중력은 훨씬 무거웠다. 어느 날부턴가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버거워졌다. 단순히 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키려 하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내 어깨를 바닥으로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이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한 자가 감당해야 할 '이방인의 중력'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면,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곤 했다.


끝없이 펼쳐진 초록색 잔디밭은 이제 더 이상 낭만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주 깎아내야 할 숙제였고,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우리 가족을 집어삼킬 듯 자라나는 불안의 상징이었다. “...다들 어디 갔니?” 주방에서 나온 엄마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의 얼굴은 며칠 새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아빠는 마당 끝에 계시고, 동생은 방에 있어요.” 내 대답에 엄마는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가서 아빠 좀 도와드려"라고 하셨을 텐데, 엄마는 그저 멍하니 벽에 걸린 시계만 바라보았다. “이 집이... 너무 크지 않니?” 엄마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그 한마디가 거실의 정적을 갈랐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우리가 외쳤던 환호성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 우리에게 이 집은 살아야 할 공간이라기보다, 어떻게든 버텨내야 할 거대한 성벽 같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엄마의 굽은 등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한국에서의 엄마는 늘 활기차고 당당했는데, 여기서는 자꾸만 작아져 갔다. 엄마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이민의 무게가 내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마당으로 나가보니 아빠가 잔디 깎는 기계 옆에 멈춰 서 있었다. 기계 소리가 멈춘 마당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아빠는 허리에 손을 얹고 먼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빠, 힘들어요?” 내가 다가가 묻자, 아빠는 깜짝 놀란 듯 나를 돌아보셨다. 그리고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이셨다. “아니, 그냥... 하늘이 참 파래서.” 아빠의 웃음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아빠가 보고 있던 건 푸른 하늘이 아니라, 그 너머에 두고 온 수많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가족을 책임지고 이 낯선 땅으로 데려온 가장의 무게. 그 무게가 아빠의 무릎을 조금씩 굽게 만들고 있었다. 집 안의 가구 하나, 창문 하나에도 이민의 무게가 스며들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짐을 지고 이 거대한 집 안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밖에서 보기엔 평화롭고 웅장한 집이었지만, 그 안의 우리는 보이지 않는 납덩이를 발목에 매단 채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유독 다리가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정신은 자꾸만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것은 곧 다가올 기묘한 꿈의 예고였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방안, 나는 다시 그 길 위에 서 있었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길이었다. 한국의 익숙한 골목 같기도 했고, 아침마다 지나던 이방인의 거리 같기도 했다. 나는 어디론가 필사적으로 걸어가려 했다. 그곳에 가면 이 답답한 안개가 걷힐 것 같았고,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발을 떼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다리는 마치 수만 개의 납덩이를 달아놓은 듯 무거웠다.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마다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분명 눈앞에는 길이 선명한데, 내 몸은 늪에 빠진 것처럼 제자리를 맴돌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입술을 깨물며 힘을 줘 봐도 다리는 마비된 것처럼 굳어 있었다. 가고 싶은 마음과 움직이지 않는 육체 사이에서 나는 질식할 것 같은 갈증을 느꼈다. 그때였다. 안개 속에서 누군가 형체도 없이 다가오더니 내 품에 무언가를 덥석 안겨주었다. 강보에 싸인 아기였다. 당황한 내가 아기를 돌려주려 고개를 들었지만, 그 사람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품 안의 아기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이 작은 생명이 내는 무게감이 내 어깨와 굳어버린 다리를 더욱 아래로 끌어내렸다. 겨우 중심을 잡고 아기를 내려놓으려 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다시 아기를 내밀었다.

"아니요, 저는 못 해요.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단 말이에요."

내 비명 섞인 거절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흩어졌다. 누군가는 무심하게, 누군가는 강압적으로 계속해서 아기를 내 품에 밀어 넣었다. 아기가 늘어날 때마다 다리의 통증은 극에 달했다. 걷고 싶은 욕망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맡겨지는 생명들의 무게. 그 사이에서 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번쩍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여전히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꿈속의 통증은 현실로 이어져 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다리가 저릿하게 아파왔고, 가슴팍에는 누군가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답답한 압박감이 남아 있었다. 꿈속에서 내게 건네졌던 아기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낯선 땅에서 내가 책임져야 할 나의 새로운 인생이었을까. 나는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아픈 다리를 주물렀다. 잠조차 완전한 도피처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반구의 길고 긴 밤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방 안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아무 소리도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소리가 침묵이라는 껍질 속에 갇혀 터져 나오지 못하고 웅크려 있는 상태에 가까웠다.

잠에서 덜 깬 다리를 주무르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문틈 너머 거실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들이 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가장 먼저 들리는 것은 아빠의 한숨 섞인 신문 넘기는 소리였다. '파스스' 하고 종이가 쓸리는 그 가벼운 소리가 그날따라 유독 무겁게 들렸다. 한국에서 신문을 보던 아빠의 모습은 여유로운 아침의 상징이었지만, 이곳에서의 그 소리는 갈 길 잃은 이방인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손짓 같았다. 형광펜으로 무언가를 긋는 '슥, 슥' 소리는 마치 아빠의 자존심을 조금씩 갉아내는 소리처럼 느껴져 나는 이불을 더 높이 끌어올렸다. 이어지는 것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소리였다. 그릇을 옮기며 내는 달그락 소리, 물을 틀어 뭔가를 씻는 소리. 평범한 일상의 소리였지만 그 소리들 사이사이에 정적이 길게 늘어졌다. 평소처럼 콧노래를 부르거나 활기찬 목소리는 없었다. 엄마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억눌린 소음들이 엄마가 짊어진 피로를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어느 날 밤에는 거실에서 아주 짧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 누군가 무거운 것에 발이라도 찧은 듯한 외마디 소리. 하지만 그 소리는 곧바로 무거운 침묵에 잡아먹혔다. 아빠였을까, 엄마였을까. 그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든 간에 그들은 이곳에서 비명조차 마음 놓고 지를 수 없었다. 이 넓은 집에서 우리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오로지 서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가짜 웃음소리뿐이었으니까.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에서, 혹은 거실의 구석에서 비명 대신 한숨을 삼켰다. 밖으로 나가지 못한 소리들은 우리 몸속에 차곡차곡 쌓여 꿈속의 납덩이가 되었고, 아기의 무게가 되었다. "얘들아, 밥 먹자." 평소와 다름없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 아래에 깔린, 차마 내뱉지 못한 수많은 소리의 잔해들을 보았다. 식탁에 앉은 우리 네 식구는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내며 조용히 밥을 먹었다. 남반구의 지독하게 푸른 하늘 아래, 우리 집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요새였다. 하지만 그 요새 안에서 우리는 각자가 삼킨 소리들의 무게 때문에 조금씩 침몰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이 거실의 공기를 가득 채우던, 9월의 그 서늘한 아침이었다.


9월이 되자 남반구의 대지는 기다렸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지독하게 푸르기만 했던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몽글몽글 피어올랐고, 공기 중에는 이름 모를 꽃들의 향취가 섞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온통 '다시 시작'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의 계절은 여전히 한겨울의 정적 속에 멈춰 있었다. 봄은 축복이어야 했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노동의 시작을 의미했다.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자 마당의 잔디와 잡초들이 무서운 기세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한 뼘씩 쑥 올라와 있는 초록색 생명력은, 우리에겐 깎아내야 할 숙제이자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의 무게였다. "세상에, 벌써 이렇게 자랐어?" 엄마가 창밖의 마당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주에 아빠가 온종일 땀을 흘리며 깎아놓은 잔디였다. 하지만 봄의 생명력은 인간의 노동보다 훨씬 빨랐다. 아빠는 말없이 창고에서 낡은 잔디 깎는 기계를 끌고 나왔다. '텅, 텅' 하며 단번에 걸리지 않는 엔진 소리가 고요한 봄의 아침을 깨웠다. 그 소리는 마치 아빠의 억눌린 짜증처럼 들려 나는 방 문을 조용히 닫았다. 세상은 찬란하게 빛나는데, 우리 가족은 그 빛 아래서 더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학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본 이웃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반소매 차림으로 조깅을 하거나, 마당에 나와 화초를 가꾸며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그들에게 이 봄은 누려야 할 권리였지만, 나에게는 그들의 여유가 마치 내 피부를 따갑게 찌르는 햇살 같았다. 영어가 서툰 나는 그들의 웃음소리 조차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의 봄 속에 섞이지 못한 채 차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관찰하는 관찰자로 남았다. "얘들아, 그래도 꽃이 참 예쁘게 폈다. 그치?" 운전대를 잡은 아빠가 백미러로 우리를 보며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내셨다. 하지만 그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빠가 보고 있는 건 꽃이 아니라, 무섭게 불어나는 잡초처럼 줄어드는 통장 잔고와 앞으로의 막막함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당 한구석에 핀 샛노란 꽃 한 송이를 보았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당당하게 피어난 그 꽃이 미웠다. 나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는데, 계절은 제멋대로 흐르며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봄은 그렇게 찬란해서 더 잔인했다. 우리의 침묵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고, 우리의 고립을 더 선명하게

증명했다. 9월의 따스한 햇살 아래, 나는 여전히 두꺼운 이불 속에 몸을 숨긴 채 이 잔인한 봄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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