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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없어 슬픈 건

아이가 아니라 나일지도 몰라

by 뤼더가든

"오늘 누구랑 놀았어?"

처음 기관에 보냈을 때 솔이에게 던졌던 단골 질문 중 하나다. 많은 양육자들이 아마 비슷한 질문을 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가 잘 지내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서 친구 관계는 기본이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더 이상 저 질문을 하지 않는다. 물론 약간의 변천사는 있었다. 누구랑 놀았는지 '탐문 및 확인수사 단계'에서 "오늘은 친구 안 물었어?", "오늘은 화 안 냈어?"와 같은 '추궁 및 점검 단계'로, 그리고 "오늘은 뭐 재밌는 일 없었어?"로 잠시 '육아 교과서 단계'를 밟았다.


여기서 잠시 솔이의 대인관계 스타일을 얘기해 보자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매우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과의 대화에서 크게 어려움은 없었고, 자매들과도 그럭저럭 (평범하게 싸우면서?) 지낸다. 외부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부끄러움 없이 말을 걸고 친구들도 잘 사귄다. 쉽게 만나고 얕게 놀고 쿨하게 헤어진다.

친구를 폭넓게 사귀지도 않고, 그렇다고 소수의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만, 완전히 혼자 지내기만 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친구에게 엄청나게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솔이만의 스타일.


2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있는데, 한창 이 친구와 함께 작은 무리를 형성하고 놀고 다닌 적이 있다. 그래도 평범하게 어울려 노나 싶어 안도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솔이가 그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뭔가 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한 친구가 무슨 말을 하면서 자기 머리를 때렸다는 거다. 솔이는 무척 당황한 듯 보였고, 그래서인지 솔이의 반응과 설명이 애매모호했다. 아이가 맞고 오는 것에 관해 초예민 보스인 남편은 당장이라도 그 아이를 쫓아갈 것처럼 굴었다. 내 생각에는 그 친구가 악의를 갖거나 무시해서 발생한 일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극한직업),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했다. 당장 맞았다의 여부나 이유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어울려 놀던 무리 안에서 어떤 역동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그 무리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건지가 더 중요했다.


"솔아, 어떤 상황인지 엄마가 너의 말만 들어서는 잘 파악이 되지 않아. 하지만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그 친구와 이 부분에 대해 더 이야기 나눠볼 수 있겠어?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줄게."

솔이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다음 날 아이는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는 솔이에게 한 가지만 물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친구는 중요한 존재지만 단지 아쉬워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안된다고 알려주면서.

"그래서 지금 네 마음은 어때? 그 친구 설명이 납득이 되었어? 이해가 돼?"

솔이는 역시 그렇다고 했고, 앞으로는 그런 행동은 조심해 달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날 이후 계속해서 그 친구들 무리와 곧잘 어울려 다녔다.

그런데 옆에서 솔이와 친구들의 전화통화를 듣고 있자 하면 가관인 경우가 있다. 어디에서 뭐 하고 있는 상황인지는 묻지도 않고, 전화를 해놓고 대뜸 용건부터 전한다.

"놀자."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놀자는 얘기도 명확하지가 않고 어수선할 뿐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어찌어찌 만나서 노는 걸 보면 신기하긴 하다.

다행히 솔이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문제는 솔이가 통화를 하다 말고 다른 걸 보며 넋을 놓거나, 알았다고 대충 대답하거나, 말하다 말고 "끊어?"라며 성급한 통화종료를 종용하기도 할 때였다. 이럴 때면 상대 친구에게 괜히 내가 미안해지고 솔이와의 관계가 틀어질까 걱정되기도 했다.

나는 솔이에게 통화할 때는 집중해서 하라고 말해주기도 하고, 다음에 뭐라고 물어야 할지, 어떻게 대답할지, 명확히 의사를 전달하고 용건을 마친 후에 끊자고 얘기해야 한다는 것 등을 코치해주기도 했는데, 그때뿐이었다.


물론, 과거에는 이보다 훨씬 더 어수선했다. 그땐 솔이에게 혹시 중간에 말을 하고 싶다면, 나의 말을 하기 전에 '말 끊어서 미안한데'와 같은 말을 하거나 오른손을 먼저 드는 것 등 깜빡이 신호를 알려주고 연습시키기도 했다. 솔이의 갑작스러운 감정표현이나 격양된 목소리가 상대방에게는 다소 공격적으로 들릴 수 있음도 설명해주기도 했다.

"솔아, 혹시 화났어?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이해하는데 잘 모르는 사람은 네가 화가 난 걸로 받아들일 수 있어.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보자."

그때에 비하면 양반이긴 한데, 그래도 전화통화 예절은 좀 더 연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또 요즘에는 이 친구들이 놀자고 불러내도 심드렁하고 귀찮아한다. 싸우거나 싫어졌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란다. 나는 되도록이면 친구들과 나가서 놀라고 솔이를 부추겼다.

"엄마! 나는 나가기 싫어도 친구가 부르면 나가야 돼?"

솔이의 울분에 찬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에는 친구 관계에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 가르쳐놓고, 이제와서는 또 친구들이 부르면 제깍 제깍 달려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엄마의 모습인가. 여전한 나의 불안이 계속해서 아이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었다.


학교 교실 안에서 여러 사건들이 겹치면서 친구를 사귀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주로 쉬는 시간에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반에서 친한 친구도 없다고 했다. 집에 와서도 친구에 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라고 하면서도 항상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얘는 정말 괜찮은 걸까? 태연한 척, 씩씩한 척하지만 사실은 외롭고 쓸쓸한 게 아닐까. 어린 시절의 나처럼.

그런 나에게 솔이의 외침과 함께 뜨끔하게 한 책의 글귀가 있었으니,


"아이가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건 우리가 그렇게 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혼자가 편할 때도 있습니다. 맞지 않는 친구와 억지로 친구가 되는 것은 아이에게 힘든 일입니다. 쉬는 시간에 혼자서 책을 읽거나 자신이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할 수 있습니다. (...) 부모의 질문 자체가 '혼자인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것이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모가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인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돌아보길 바랍니다. (...) 많은 또래와 어울리는 법을 익히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법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관계를 맺고 끊는 것은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이사비나, <<우리 아이가 ADHD라고요?>> 중


나는 사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이 아이가 학교에 못 다닐 줄 알았다(물론 자백컨데, 얼마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이전 연재글 참조). 나중에 직장생활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솔이는 비록 장기간의 깊은 관계를 맺어가는 데 있어서는 조금 서툴지 모른다. 하지만 단기간의 얕은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능숙하다. 생각해 보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극도로 부담스러워하던 내가 참 부러워하던 성격이다. 낯선 사람과의 거리낌 없는 친밀감, 사교성. 그럼 거기에 맞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관광 가이드나 서포터즈 응원단장 같은 거 하면 참 잘할 것도 같다. 예전에 ADHD가 있는 사람들은 응급실에서 일할 때 그들의 빠른 판단과 일처리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이제 나는 솔이에게 그저 "잘 다녀왔어?"라고 가벼운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더 이상 친구의 전화 한 통에 내가 더 안절부절못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최근 사회성 그룹치료를 위해 찾아가 본 센터에서는 솔이가 친구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화용언어가 잘 사용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여 언어치료 수업을 시작해 보았다. 머리로는 알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간결하게 전달하거나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조금 어려운 때가 있기 때문이다.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경계를 지키는 것에 관해 인지할 수 있도록 해보고 있다. 처음에는 자기가 무슨 문제가 있냐고 심드렁하던 솔이는 언어치료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하나씩 열심히 배워가고 있다.


솔이의 관계와 삶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괜찮을 것이다. 내 생각과 경험을 뛰어넘어 훨씬 더 잘 살아갈 것이다.

인생이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아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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