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나는 외출도 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종일 음악 볼륨을 크게 해서 듣고 또 들었다.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웅크린 채 잠만 잤다. 잠결에 형이 내 방문을 열고 밥을 가져다 놓는 것을 언뜻언뜻 바라보았다. 자다가 깨어보면 식단은 또 바뀌어 있었다. 2월 끝자락인데 밖엔 비가 내렸다. 겨울비라 하기도 모호하고, 봄비라고 하기에도 모호했다. 비가 내릴수록 점점 찬 기운이 물러가고 말랑하고 보드라운 기운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촉촉한 비를 맞은 나무들은 머지않아 새순을 틔울 것이다.
유리병 속의 달팽이는 오늘도 분주히 꼬물거렸다. 아침이면 유리병 안에 제 몸을 다 드러낸 채로 붙어 있었다. 나는 유리병 속의 달팽이를 가방 속에 넣었다.
샤워를 마친 후 깨끗이 세탁한 셔츠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일주일만의 외출이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앞까지 걸어갔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니 경비원이 온 용건을 물었다. 지금은 봄방학이라 수업을 안 한다고 했다. 나는 교실에 물건을 두고 온 게 있어서 찾으러 왔다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계단을 지나 화장실 뒤쪽으로 갔다. 담 옆으로 솔숲이 우거져 있는 것도 그대로였다. 솔숲에서 불어오는 솔 향기도 여전했다. 서늘한 냉기를 머금은 화장실 콘크리트 벽은 축축했다. 이 화장실 벽 앞에서 광식이라는 놈에게 맞고 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 바닥에 몸을 눕히고 뒹굴었을 내 모습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광식이와 나누었던 그 많은 말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모두 내 안에서 나온 것들이란 말인가. 나는 왜 그런 헛것에 시달리며 수많은 시간을 괴로워했을까. 새삼스레 기가 막히고 허탈했다.
어느 날 난, 전혀 예기치 않게 조현병에 걸리게 됐다. 갑자기, 그야말로 갑자기, 뇌 속에 흐르는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길 때 걸릴 수 있는 병이다. 조현병은 어떤 특정한 사람만 걸리는 병이 아니다. 조현병이 걸린 사람과 걸리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한 끗이다. 누구라도 조현병에 걸릴 수 있다. 나도 내 운명에 조현병이 찾아올 줄 몰랐다. 그래서 헛것이 보이고, 환청이 들리고, 정신을 갉아 먹히는 병. 나는 그동안 감쪽같이 속고 있었다. 내 안에서 생겨난 요망한 헛것들에 시달리며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고, 울분에 차 있었다. 죽고 싶기까지 했다. 학교 뒷문으로 나가면 오솔길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뒷문은 잠겨 있었다. 정문으로 나와 학교 뒷문 쪽 솔숲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습기를 머금은 소나무들이 무리를 이룬 채 우뚝우뚝 서 있었다. 겨울을 지난 마른 풀들이 바스락거리며 발에 밟혔다. 사람 하나 다닐 만한 오솔길이 이어져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나무 사이를 걸었다. 밝은 햇살이 나무를 환하게 비췄다. 비가 그치고 나온 햇살이라 유난히 눈부셨다. 뿌연 햇살 아래 광식이가 멀거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식이는 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보였다.
-야! 너, 내가 사라진 줄 알았냐? 킥킥킥.
광식이가 특유의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꺼져!
나는 광식이를 향해 내던지듯 말했다. 광식이는 다른 때처럼 나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가라고. 앞으론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이 새끼야.
-웃기고 있네! 새꺄, 착각하지 마. 난 절대 사라지지 않아!
광식이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지껄여댔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맥이 빠진 모습이었다.
-가! 가라고!
나는 소리쳤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광식이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넌, 아웃이야……!
나는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광식이를 내 안에서 추방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
나는 눈을 뜨기가 두려워 꼭 감았다. 순간, 내 안에 뭉쳐 있던 묵직한 덩어리가 울컥 터져 나왔다.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뭔가가 잘려나가듯 쓰렸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들이 쏟아져 내리고, 그 사이로 비틀비틀 멀어져가는 광식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잘 가!
광식이에게 작별을 고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서서 광식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광식이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내 눈에서 보이지 않았다. 이제 분하지도 억울하지도 않다. 담담한 마음이다. 앞으로는 저런 헛된 환각에 매달려 내 인생을 허비하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어차피 별다른 방법은 없다. 죽기 전까지 빠트리지 않고 약만 잘 먹는다면 다시는 헛것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
내가 퇴원하는 날, 주치의가 했던 말이 그제야 되살아났다.
-어쩌다 환청이 들리고 환시가 나타나면 꼭 말을 하세요. 그에 따른 약 처방을 해 줄 테니.
그 당시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광식이가 환시인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을 안 했던 거였다. 부작용은 있겠지만, 죽을 때까지 내 몸 상태에 맞춰 약 처방은 계속 달라질 것이다.
다음 주엔 병원에 간다. 주치의에게 광식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앞으로는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살지도 않겠지만, 남의 잣대에 맞추어 나를 포장하며 살아가지도 않을 거다. 나 자신을 믿고 꿋꿋하게 내 안의 마음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화폭에 담을 생각이다. 아직도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용기가 아직은 부족한지도 모른다. 가다가 부딪치고 넘어진다 해도,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내 페이스를 지키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가방에서 유리병 속에 들어있는 내 달팽이를 꺼냈다. 달팽이는 숲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라도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었다. 그동안 정들었던 달팽이를 숲 바닥에 놓아주었다. 달팽이는 멈칫하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달팽이를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던 달팽이가 천천히 더듬이를 내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잘 가!
달팽이에게 작별을 고했다. 달팽이는 천천히 숲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슴 깊숙이 나무들이 내뿜는 솔 향기가 내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