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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유목민 Oct 06. 2024

그땐 그걸 왜 몰랐을까

1부/ 떠난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

공부를 뛰어나게 잘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성격이 활달해서 튀는 아이도 되지 못했던 나는 그저 평범한 여고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어서 육성회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하면 교실 앞에서 손을 들고 서 있어야 했던 때였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하고 민감했던 여고 시절,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폭력과 수치와 모욕감을 주는 행동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곤 했다.      

그날도 우리 반 담임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한 아이들을 차례로 불러 세우기 시작했다. 나도 앞으로 불려 나갔다.     


“나는 너희들이 육성회비를 안 냈다고 해서 불러낸 건 절대 아니다. 너희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약속은 중요하다. 너희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로 벌을 받는 것이다. 손들어!”  

   

앞으로 불려 나간 아이들과 나는 교단 앞에서 손을 들었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폭삭 사그라져 없어져 버리고 싶을 만큼 친구들 앞에서 당하는 모욕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손상된 내 자존심이 억울하고 분했다. 한참 만에 벌을 세운 담임과 내일까지 육성회비를 가져오겠노라 약속하고 담임의 노트에 날짜와 이름, 지장을 찍고 나서야 자리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내일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거짓말하는 학생이 되는 것이고, 또다시 아이들 앞에서 손을 들고 있어야 한다. 그 당시 가구점을 하던 우리 집은 아버지가 납품업자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가구점 사업이 퇴로를 걷고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엄마가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어떻게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지 전혀 몰랐던 때였다.     

 

집으로 간 나는 학교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며 복받쳐서 눈물을 쏟았다. 내일까지 돈을 가져가지 못하면 난 절대 학교에 가지 않겠다며 방문을 걸어 잠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학교 갈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엄마와 오빠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오늘 학교 마감 시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육성회비를 만들어 볼 테니 제발 학교에 가라는 것이었다. 절대 약속 어기지 않을 테니 엄마를 믿고 학교에 가라고 나를 달랬다. ‘엄마를 믿고’라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늦어버린 학교 시간에 맞추기 위해 오빠 자전거 뒤에 타고 학교에 갔다.     

수업 시간에도 수업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가 마감 시간까지 학교에 올 것인가 말 것인가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지루했던 수업이 끝났지만 기다리던 엄마는 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학교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 서무실 앞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순간순간 일 초일 분이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학생들이 학교를 다 빠져나가고 교무실의 선생님들도 거의 퇴근하고 없었다. 가슴이 타들어 갔다. 도저히 더는 서무실 앞에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터덜터덜 운동장을 지나 교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초조하고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교문이 닫힐 즈음, 멀리서 엄마가 숨 가쁘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머리에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추운 날 장터에서 찬바람 맞은 엄마의 얼굴은 시퍼렇게 얼어 있었다. 엄마는 숨을 헐떡이며 서무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엄마 얼굴을 기억한다. 다급함과 미안함이 교차하고 있던 표정, 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약속한 대로 엄마와 함께 서무실에 가서 육성회비를 낼 수 있었다.

그날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는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부엌 부뚜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가 저녁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수건을 머리에 두른 후 앞치마를 허리에 동여맸다.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부엌 안을 오가며 저녁 준비를 하는 엄마의 눈빛은 진지했고 분주했다. 종일 시장에서 장사하고 와서도 전혀 피곤한 기색 없이 엄마의 칼끝은 기분 좋은 장단을 두드리듯이 리듬이 있고 경쾌했다. 파를 썰고 마늘을 다지는 엄마의 손놀림은 노련했다. 가마솥에서 김이 올라오며 밥이 끓자 엄마는 계란 다섯 알을 깨서 새우젓 넣고 휘저어 밥 위에 쪄냈다. 엄마는 끓고 있는 시래깃국을 한 수저 떠서 내 입에 불어넣으며 맛이 어때?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할 만큼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나는 엄마표 시래깃국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맛이 그리워 혼자 해 보지만 엄마의 그 맛을 살릴 수가 없다.     


엄마는 유난히 장독대에 정성을 들이셨다. 어찌 보면 장독대를 섬겼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집 장독대는 항상 청결했고 반들반들 윤이 났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장독대가 음식의 저장 창고였다. 고추장이나 된장 항아리에는 생고기도 들어가고 무나 오이도 들어갔다. 때로는 깻잎이나 콩잎, 참외나 떫은 감도 들어갔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떫은 감도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쫄깃하면서도 아삭한 맛으로 변해 미각을 돋워주곤 했다. 그날 엄마는 장독 항아리에서 꺼낸 오이장아찌를 물에 담가 짠물을 뺀 다음 잘게 썰어 참기름에 무쳤다.      


그날 저녁 반찬은 김치와 오이장아찌, 새우젓을 넣고 찐 계란찜이 전부였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저녁밥이 맛있었는지. 그날 학교에서 엄마를 기다릴 때 온몸으로 조여오던 불안과 초조, 일분일초를 다투던 간절한 기다림 끝에 엄마를 봤을 때의 울컥한 마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가난하지만 오붓한 저녁상. 가족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전해지던 평화롭고 안온한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세월이 흘러도 엄마의 손맛이 잊히지 않는 건 엄마의 사랑이 내 몸속 세포 구석구석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엄마의 사랑을 들이마시듯 시래깃국을 들이마셨고, 오독오독하게 씹히던 오이장아찌의 식감을 오래 음미했다. 자식들에게 충만하고 따뜻한 행복감을 주었던 엄마, 우리 형제들은 그렇게 엄마의 음식을 먹고 키가 컸고, 몸속 장기들이 자라났다.   


그때는 그걸 왜 몰랐을까. 

마치 당연한 것처럼 우리는 엄마라는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쭉쭉 빨아들이기만 했다. 지금의 나라면 엄마처럼 그렇게 자식들에게 할 수 있었을까? 나 같으면 피곤하다고, 나 좀 알아달라고, 징징거리며 아이들을 힘들게 했을 텐데.

이제는 더 이상 엄마의 손맛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언저리는 언뜻언뜻 먼 하늘가에 머물곤 한다. 주방 창밖으로 새가 한 마리 날아간다. 새는 곧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우리 인생도 저렇게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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