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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유목민 Oct 07. 2024

기억의 소리

1부/떠난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

 2024

내 어릴 적, 사람들은 우리 집을 혹보네 농방이라 불렀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혹보네 농방을 기억할만한 사람은 고향에서도 아마 없을 것이다. 혹보네 농방은 자리만 없어진 게 아니라 내 기억 속에서도 희뿌연 안갯속 끝자락에 가물거리고 있는 유년의 불빛이다. 간혹 고향에 내려가 그 자리를 지나치곤 하지만 그곳이 혹보네 농방이 있었던 자리였음을 증명해 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자리는 대형 마트가 들어서 있었으며 농방 앞 골목은 사거리로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그 건물은 마치 예전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버티고 서서 차와 사람들로 복잡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집 마당을 들어서면 안채엔 식구들이 살았고, 행랑채는 가구 일을 하는 곳이었다. 마당 한쪽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고 앞마당에는 어머니가 가꾼 꽃밭이 마당 가득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맨드라미, 칸나, 백일홍, 샐비어 등. 화려하진 않았지만 소박한 꽃들의 향연에 누구라도 우리 집을 들어서면 탄성을 질렀다. 꽃밭 가장자리에 심어있는 해바라기와 옥수수나무 뒤를 돌아가다 보면 수세미 줄기가 넝쿨을 뻗어 그늘을 드리웠고 군데군데 수세미가 달려 있었다. 난 그곳에 그림자처럼 숨어들어 풋내 나고 축축한 흙냄새를 맡곤 했다. 물을 받기 위해 잘라놓은 수세미 줄기에서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생명수처럼 들여다보며 하나 둘 숫자를 세곤 했다.


아버지는 질 좋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여러 날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튼튼한 원목을 구해 제재소에서 통판으로 잘린 나무들이 화물차에 실려 도착하는 날이면 우리 집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일꾼들이 동원되어 마르지 않은 나무판들은 벽에 기대어 세우고 마른 나무판은 창고에 차곡차곡 쌓았다. 우리 집 담벼락에는 널따란 나무판자들이 빙 둘러 세워져 있었고 풋풋한 나무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우리는 나무 뒤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곤 했다.

아버지는 일꾼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고기 근을 끊어 오셨다.

그날 저녁 마당에 숯불을 피워놓고 일꾼들과 식구들은 빙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었다.

“노래 한 곡조씩 해봐라.”

아버지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나를 불러 노래를 시켰고, 일꾼들에게도 노래를 시켰다. 아저씨들은 못한다고 꽁무니를 빼다가도 곧잘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나훈아의 ‘고향역’이나 남진의 ‘님과 함께’를 다 같이 부르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가구 주문이 밀려들었고 새벽까지 일을 했다.     


큰오빠의 방에는 군복을 까맣게 물들인 오빠의 외출복이 걸려 있었고 비틀스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나는 오빠가 자주 부르던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내용도 모른 채 따라 흥얼거리기도 했다.  

해 질 녘이면, 창호지문을 통해 살포시 들이치던 저녁햇살의 포근함과 부엌에서 나는 음식냄새, 할아버지 방에서 들려오는 시조가락의 안락하고 평온했던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일방은 나의 놀이터였다. 어머니는 일방에 자주 들락거리는 나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누런 아교를 툭툭 끊어서 깡통에 집어넣기도 하고, 아교가 끓어 말갛게 되면 저어보겠다고 떼를 쓰곤 했다. 대패꽁무니에서 꼬물꼬물 나오는 대패 밥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그것을 곱게 말아 머리에 화관처럼 써보기도 했다. 저녁때가 되면 어머니는 그 대패 밥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었다. 그것은 자작자작 신음소리를 내며 발갛게 타들어 갔다.     


나는 틈만 나면 일방에 들러 기술자 아저씨들이 자개장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아저씨들은 맨 먼저 화선지에 학과 소나무를 그린 다음 그 그림본에 자개를 오려 아교 칠을 해 붙였다. 다 붙인 자개그림 뒷면에 아교 칠을 해서 판자에 대고 인두로 지지면 달구어진 인두에서는 피시식 소리를 내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술자 아저씨들의 팔뚝에는 힘을 줄 때마다 근육과 심줄이 울룩불룩 움직이고 땀이 밴 아저씨들의 얼굴 표정도 따라서 같이 움직였다. 그 모습이 우스워 키득거리는 나에게 아저씨들은 눈을 흘기며 같이 웃어주었다. 힘을 들여 붙인 자개 종이를 떼고 난 장롱은 일꾼들이 칠방으로 옮겨갔다. 칠방에 들어서면 후끈한 열기와 칠 냄새로 눈이 따갑고 쓰렸다. 칠이 잘 마르게 하기 위해 칠방 아궁이에는 항상 톱밥 섞인 대패 밥이 수북이 타고 있었다. 여러 번 칠을 한 장롱이 마르면 다시 일방으로 옮겨졌다. 일꾼들은 자개 위에 입혀진 칠을 끌로 벗겨내야 했다. 그것은 아주 정교한 작업이었다. 자칫하다 실수라도 하게 되면 가구에 흠집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칠을 벗겨낸 자개농에 물을 입히고 사포로 밀어 곱게 다듬는 일이 끝나면 윤을 내기 시작했다. 헝겊에 왁스를 묻혀 힘을 주어 닦는 작업은 오랫동안 해야 했다.    

 

일방에서는 항상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일꾼들은 일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고, 밤이 되면 일일 연속극을 빼놓지 않고 들었다. 공부를 하다가 한밤중에 마당을 나와 보면 일방에서는 라디오소리와 웃음소리, 망치소리, 대패질 소리들이 들려 활기를 띠었다.

그렇게 호황을 누리던 혹보네 농방이 포마이카 가구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유행을 타면서부터 서서히 일거리가 줄어들어갔다. 일거리가 없어서 일꾼들도 한두 명씩 떠나가기 시작했고. 기술자 두어 명만 남아 자개농을 만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우리 가구를 떼어가던 도매업자들마저도 수금을 해주지 않고 행방을 감춰버렸거나 포마이카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려서 일꾼들의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모두가 떠나고 남은 적적한 일방에서 아버지는 손수 가구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리도 자주 드나들던 일방에 아버지가 일을 하고부터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방에서는 라디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무판을 대패로 미는 소리, 나무를 자르는 톱질 소리, 망치소리들만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그 소리는 예전에 활기차게 들리던 소리와는 다르게 내 살을 파고드는 것처럼 아프게 들려왔다. 아버지가 만든 가구는 시장에 내놔도 잘 팔리지 않았다. 간혹 혹보네 장롱이 실하고 오래간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가구를 맞추면 그 주문에 따라 맞춤가구들을 소일거리로 만들 뿐이었다.

그나마 아버지는 일을 오래 할 수가 없었다. 인도네시아 원목을 잘라 만든 보루네오가구가 TV선전에 나오기 시작했고, 썬퍼니처나 삼익가구 같은 기업 가구들이 시장을 점유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또 죽었다. 그 집도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그곳에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았는지 아는 사람은 이제 없다. 앞으로도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다.     


불현듯 나를 일깨워준 그 집이 그리워져 나는 오래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지금도 희미하게 가물거리고 있는 내 기억의 끝에는 항상 혹보네 농방이 자리하고 있다. 아직까지 그 기억들이 왜 지워지지 않고 있는지. 이제는 세상 어디에서도 혹보네 농방은 찾아볼 수 없다. 일방에서 들려오던 라디오 소리와 웃음소리, 망치소리, 대패질 소리도 다시는 들을 수 없다. 얼굴에 포도송이처럼 검붉은 혹이 달린 아버지도 이제 이 지상에 없다. 나는 이제 혹보네 농방의 추억이 따뜻하지만은 않다. 그 추억은 내 마음속 축축하고 어두운 구석에 남아 기억을 환기할 때마다 아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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