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배우시고 텃밭을 만드신 아버님
벌써 25년 전 일이다. 시아버님께서 70세에 하던 병원을 정리하고, 그린벨트로 묶여있는 땅에 채소를 길러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다. 아버님께서 텃밭을 해보지 않았으니 공부부터 해야겠다며 도서관에 가자고 하셨다. 책을 빌리고 메모를 시작하셨다. 몇 달을 보시더니 포클레인을 불러달라고 하곤 밭을 한번 확 뒤집으셨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땅도 엉망이고 고르지 않았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 매일 밭으로 출근하셨다.
아버님이 의대생일 때 일이다. 많이 바쁘고 해야 할 공부도 많았을 텐데 아버님은 똥지개까지 졌다는 말씀을 하셨다. 정말 상상도 가지 않는 일이 일이다. 그때도 사람 쓰는 일은 바로 품값으로 열결 되니 아버님께서 할머니를 많이 도우셨단다. 그렇게 아버님은 언제나 집안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오셨다. 병원 간판을 내리고는 텃밭을 가꾸겠다고 하셨다.
아버님은 상추를 특히 좋아하셔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원하셨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병원 옥상에 작은 텃밭이 있었고 노할머니께서 가꾸셨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텃밭을 없애셨으니 그간 안심먹거리가 없어서 고민하셨다. 또 손주가 토마토를 아주 좋아해서 그것도 심어야겠다시며 신나게 농사에 진심을 다 하셨다. 시작하실 때에 나는 아이 셋에, 어머님은 병환 중이었고 노할머니도 살아계실 때라 밭에 따라다닐 수는 없었다.
처음엔 차에도, 옷에도, 도구들에 흙을 묻혀오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 차츰 가져오시는 채소가, 정말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과는 완전 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상추는 그렇게 보들보들하고, 고추는 맵지 않고 부드러워서 차츰 신기한 눈으로 보게 되었다. 상추부터 시작하셔서 겨울 김장배추, 무까지 기르셨다. 아주 다양하게 근 20년을 가꾸시다가 90세가 되시면서 슬슬 손을 놓으셨다. 얼떨결에 나는 밭으로 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버님은 정말 제대로 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책도 제대로 보지 않고 아버님이 남겨놓으신 텃밭에 그냥 덤벼드니 시행착오가 많다. 나도 다시 도서관으로 가볼 일이다. 제대로 한번 아웃트라인을 잡고 그간 뭐가 잘 못 되었는지 짚어 볼 시간이 왔다. 이 참에 어느 사이 내 안으로 훅 들어온 텃밭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어보려고 한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일 년이 되었다. 이번에 제사 준비하면서 아버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정말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을 써 본 적도 없는 내가, 아버님 병환 중이실 때 그간의 추억을 전자책으로 내면서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또 텃밭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시고 이렇게 브런치에도 글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으니 얼마나 큰 선물인가?
각 각 멀리 있는 두 딸이 자기들도 시간에 맞춰 와인 한잔에 할아버지 좋아하시는 요리하나에 꽃 꼽고 촛불 켜고 기도했단다. 그렇게 아버님의 품은 넓었다. 아버님이 주신 여러 경험으로 잘 나누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