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지 못하는 아내, 울지 못하는 남편
지인의 남편은 감정 표현에 서툴렀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반면에 감수성 예민한 아내는 소통 없는 그와의 생활이 마치 병정과 사는 것처럼 답답하다며 힘들어했다. 18년 동안 같이 살면서 남편이 눈물 한 방울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남편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울지 않았다. 흔한 말로 ‘남자는 일생에 세 번 운다’라고 하는데 그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히 슬펐겠지만 남편에게는 맏아들로서 그저 장례를 잘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꿈을 꾼 남편이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말을 걸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꿈에 나왔는데…”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남편의 눈물샘이 터졌다. 그 울음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오는 듯, 혹은 오랫동안 닫아둔 수문의 댐을 열 듯 쏟아졌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오래전 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떠올리며 눈물 흘렸다.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과 경제적 무능력으로 인해 그의 부모는 매일같이 전쟁 같은 싸움을 치렀다. 지긋지긋하게 싸우던 두 분이 돌아가시자 남편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감자 캐듯 연이어 일어나는 슬픈 기억들로 남편의 울음은 며칠 내내 멈추지 않았다. 새삼 잊고 산 감정들이 거듭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물의 수도꼭지가 한 번 열리고 난 이후 남편은 이제는 텔레비전 드라마만 보아도 눈물을 철철 흘리는 남자가 되었다고 한다. 감정에 꽁꽁 갇혀 있다가 이제 풀려난 것일까? 신기한 일은 눈물만이 아니었다. 예전의 경직되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던 남편이 바뀐 것이다. 장난기 가득한 농담도 자주 건네고, 실없는 웃음도 많아졌다. 무엇보다 늘 얼굴 가득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자 피부마저 환해졌다고 한다. 지인은 오래전 연애할 때 순수했던 남편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다며 “내 남편이 달라졌어요”라는 말과 함께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지인의 남편이 끝까지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면 그들의 부부 생활은 어떠했을까? 소통 없는 남편과 이를 답답해하는 아내의 부부 생활은 결코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올바른 감정 표현은 관계에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한 여성은 화가 나거나 황당하거나 상대가 무례하게 대하는 등 곤란에 처하면 웃어버리고는 했다. 그래놓고 남몰래 관계를 끊어버렸다. 서로 잘 지낸다고 생각하던 상대는 오히려 당황스러워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부부 관계에서도 적용되었다. 남편에게 크게 화가 날 때마다 울음을 터트렸다. 남편은 우는 아내 손에 값비싼 선물을 쥐어준 뒤에 얼렁뚱땅 넘어갔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내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화가 날 때 화를 내야 한다’라는 단순한 명제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까? 우리는 모두 어릴 때부터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감정을 억제하며 자란다. 양육자는 일반적으로 아이들을 키울 때, 성별에 따라 알게 모르게 다른 감정과 정서로 반응한다. 흔히 여자아이의 감정 표현은 받아주는 편이지만, 남자아이에게는 ‘나약하게 자랄까 봐’, ‘감정적인 아이가 될까 봐’ 등의 이유로 잘 받아주지 않는다. 특히 남자아이가 눈물을 보이면 불편해한다.
여자아이에게도 잘 수용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 남자아이가 화를 내면 ‘남자답다’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이지만, 여자아이에게는 ‘성깔 있다’, ‘그러면 시집 못 간다’, ‘여자는 상냥해야 한다’라며 제지한다. 이런 반응을 들은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화내는 것을 불편해한다. 화내는 자신이 여자답지 않고, 그 모습이 예쁘지 않을까 봐 스스로를 검열한다.
이런 이유로 남자든 여자든 자신 안에 어떤 강한 내적 장치가 비상경보기 울리듯 감정을 멈추게 한다. 그리하여 남자는 울고 싶으면 화를 내고, 여자는 화내기 어려우면 눈물을 터트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런 감정은 상대를 다루는 무기로 작용되기도 한다. 여자는 울지 못하는 남자에게 울음을 무기로 삼고, 남자는 화내지 못하는 여자에게 화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결혼 초반에 나는 남편과 싸울 때마다 마지막 무기로 눈물을 보였다. 그럴 때면 남편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남편 또한 싸우다가 지쳐버리면 버럭 소리를 지르고 그만하라고 화를 냈다. 그러면 내가 움찔 물러서고, 그로써 싸움은 흐지부지 종료되었다. 그때마다 미처 풀지 못한 감정과 불만들이 제대로 표출되지 못하고 내 안에서 방향을 잃었다.
이는 서로의 관계에 좋게 작용하지 못한다. 감정은 표현되어야 한다. 화가 날 때 화를 내지 못하고,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면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흐름이 막힌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는 벽이 놓인 것처럼 소통이 어려워지고 답답해진다. 표현하지 못해 쌓인 감정은 통제되지 않고 갑자기 터지는 폭탄이 되기도 한다.
화를 표현하지 못하고 분노를 억압하는 것은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였다. 감정은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열쇠이자 나를 알고 이해하며 돌보는 핵심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내 감정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럼에도 화내려고 하면 심장이 떨려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두려움 탓이다. 호흡을 좀 진정시키고 나면 그때는 이미 때를 놓친 뒤였다. 때로는 진짜 왜 화가 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화를 내야 할지 아닐지조차 혼란스럽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화난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분명 내 안에 있는 어떤 감정을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할 때, 뭉뚱그려진 불편한 마음이 불쾌감이나 우울로 발현되었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몸으로도 나타났다. 소화가 잘되지 않거나 머리가 아프고 어깨가 무겁거나 뒷목이 뻐근하며 쉽게 피로했다. 화가 날
때 화를 내는 그 단순한 행동은 많은 시간과 연습이 쌓인 뒤에야 점차 가능해졌다.
《비폭력 대화》의 마셜 B. 로젠버그는 “느낌의 근본은 욕구”라고 표현했다. 즉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열쇠가 감정·느낌이라는 것이다. 느낌은 필요나 원하는 바를 얻을 때의 느낌과, 얻지 못할 때의 느낌 두 가지로 나뉜다. 불쾌한 느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다. 그러므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알 수 없는 복잡한 미궁 같은 마음속 감정의 실마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필요나 원하는 바를 찾게 된다. 반대로 감정을 억압하면 마치 미궁 속의 미노타우로스에게 잡아먹히듯, 자신이 진짜 원하는 바를 영영 잃어버린다. 이처럼 감정은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는, 마음속 계기판과 같다.
연료가 부족하면 빨간불이 켜지는 자동차 연료등처럼, 불편한 감정은 자신에게 켜지는 빨간불이다. 그럴 때 잠시 나를 멈추어 세워야 한다. 감정이 알려주는 신호에 따라 스스로를 점검하며 살피는 것이다. 멈추고 점검하는 시간이 바로 자신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연료를 채우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