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고 작은것부터 서로의 마음 표현하기
사랑은 서로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을 주고받을 때 느낄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을 것이다. 마음을 담아 최고를 주었는데 받는 사람이 시큰둥하거나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면, 주는 사람은 서운할 수 있다. 반대로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받았다면 어떻겠는가? 자신에게 최선이 상대에게는 최악이 된다면 말이다.
그와 같은 이야기가 박해조 시인의 ‘소와 사자의 사랑의 이야기’에 나온다. 소와 사자는 사랑해서 결혼하고 항상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한다. 소는 사자를 위해 자신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인 풀을 대접한다. 이에 사자는 싫어도 참고 먹는다. 사자도 가장 연한 살코기를 소에게 대접한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고 먹는다. 둘은 참는 데 한계에 이르고, 끝내 크게 다투며 헤어진다. 둘은 헤어지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에게 최선을 다했어!”
이 이야기는 물어보지도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도 좋아하리라 확신하고 행동하면 때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악을 불러온다는 교훈을 준다. 평소에 필요와 원하는 바를 자주 표현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표현이 중요하다. 아니, 표현은 ‘의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을 ‘고지의 의무’라고 말하고 싶다. 부부 사이의 많은 문제가 서로 말하지 않아서 쌓이는 감정 때문에 생긴다. 미리 정보를 공유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자잘한 문제들이 꽤 많다.
나의 남편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다. 캐물으면 마지못해 “됐어”, “괜찮아”라고 했다. 귀찮게 묻지 말고 알아서 해주기를 원했다. 나 역시 일상에서 원하는 것들은 잘 표현했지만, 내 감정만큼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그냥 알아주기를 바랐다. 특히 분노에 대해서 그러했다. 화나면 입을 다물고 어두운 분위기를 내뿜었고, 며칠 동안 찬바람을 쌩하게 일으키고는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남편은 모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모를 수 있지?’
알아주지 않는 남편에게 더 화가 났다. 사실 표현하지 않는데 그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단지 추측만으로 해석·판단하는 어리석음이 반복되었을 뿐이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사는가? 부부란 무엇인가?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산다면 부부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처럼 연결되지 못한 마음은 억울함과 원망, 미움, 분노를 쌓아간다. 부부로서 어느 한쪽에게는 중요한 일이 상대에게는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 부부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의외로 빈번하다.
마흔 넘어 재혼한 어느 부부의 이야기다. 남편은 퇴근하고 돌어왔을 때 밥상이 바로 차려져 있지 않으면 은근히 짜증을 냈다. 아내는 미리 준비해놓지 못할 때가 잦았다. 평소에 남편은 스스로 참을성 있는 괜찮은 남편이라 생각했다. 밥이 늦을 때마다 화를 내는 태도는 소인배 같아서 여러 번 참았다.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에 화가 터졌다. 아내가 국과 반찬은 다 해놓고 밥 안치는 것을 깜박했다. 이것이 남편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내는 갑자기 화를 내는 그가 당황스러웠다.
왜 우리는 서로에게 잘 표현하지 않을까?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라고 착각한 것이 아닐까? ‘서로 사랑한다면, 남편이라면, 아내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알겠지’라는 착각 말이다. 이런 생각은 위험하다. 심지어 자신조차 스스로를 모를 때가 많지 않은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리라는 착각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면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 분노에 분노를 더한다.
우리는 30년을 같이 살아도 모르기도 하고, 1년만 함께해도 많은 것을 알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서로 얼마나 자주 속 깊은 대화를 주고받는가에 따른다. 기본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다’라고 알려주는 책임은 각자에게 있다. 서로에 대해 아는 점이 많을수록 서로에게 이익이다.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한 대로 판단하기보다는 서로 물어보아야 상대가 진짜 원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다.
서로에 대해 말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말하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말을 꺼냈다가 거절당하지 않을까, 내 마음을 들키지 않을까, 비난받지 않을까,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무시당하지 않을까 등 이런저런 두려움 탓에 말문을 닫는다. 혹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처럼, 표현했다가 두려워졌던 경험 탓에 미리 주저하고 망설이기도 한다.
또는 말에 대한 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문화는 말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남자(여자)가 말이 많다’, ‘말만 번지르르하다’, ‘말 많은 사람 치고 잘하는 놈 못 봤다’는 관용어처럼, 말 많은 이는 눈 밖에 나고, 조용히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는 아이는 예쁨받았다. 특히 남자는 과묵해야 양반 취급을 받았다. 가정에서도 밥상에서는 ‘밥 먹을 때 말하면 복이 달아난다’라며 말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문화는 ‘입 다물고 사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이런 문화가 사람들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에 문제를 키워나갔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서로의 생각·상황·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결국 평행선처럼 혹은 섬과 섬처럼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말수가 적은 사람이 잘 들어줄 것 같지만, 사실 말하기가 안 되는 이는 들어주기도 서툴다. 입 다물고 벽처럼 있는 남편, 감정 표현을 못 하는 아내가 마음으로 연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 부부는 관계가 바닥을 친 이후 다시 연을 이어가려고 시도했을 때 ‘서로의 마음 표현하기’를 우선시했다. 쉽지 않았다.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연습이 필요했다. 때로는 너무 사소해서 상대로부터 별것도 아니라고 면박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말을 가로막기도 했다. 그러나 부부에게 사소한 일이란 없다. 일상은 사소한 일들의 연속이고 사소하다고 입을 다문 것들이 쌓여 태산을 이루어왔다. 그리고 사소하면 또 어떤가. 부부에게는 둘만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될 수 있다.
소소하던 것들을 표현하기 시작할 때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레짐작하고 판단했던 것들이 사실과 달랐음을 깨닫고, 상대에게 품은 불만들이 사실은 내 이면이었음을 깨달았다. 표현하지 않았으면 전혀 모르고 살아왔을 상대에 대한 진실, 내 경험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며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사실을 점차 알아갔다.
표현하고 들어주는 부부의 대화는 남편의 섬과 아내의 섬을 이어주는 탄탄한 다리가 된다. 1년에 한 번 마주하는 오작교가 아니라, 언제라도 만나도록 연결된 다리다. 서로에게 ‘고지의 의무’를 다할 때 부부는 더는 섬과 섬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