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차갑고 손은 따뜻했다
이틀 연속 만난다고 하니 꼭 연애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꾸안꾸' 메이크업으로 한껏 공들여 꾸민 후 기다렸다. 그는 우리 집 근처에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긴장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신호등 앞에 서니 저 멀리 그가 보였다. 나를 발견한 그는 차에서 내려 천천히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확실히 그는 옷을 잘 입는 편은 아니었다. 약간 등산바지류의 바삭거리는 곤색 바지를 입었다.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록색 등산화 비슷한 운동화. 그는 웃는 얼굴로 걸어왔지만 나는 얼른 차에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차에 타서 운전하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약간 긴장한 듯 핸들을 잡은 모습이 귀여워 바삭거리는 등산바지와 신발을 잊어주기로 했다.
우리는 호수가 보이는 카페로 갔다. 3층 구석 소파 자리에 마주 앉았다. 평범한 나의 하루를 그가 참관하는 것 같은 데이트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도 읽을 책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책을 펼쳤다.
집중이 됐을까? 절대.
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그는 커피와 디저트류를 가지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자리가 3층 구석이라 다행이었다. 나는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그가 뒤돌자마자 거울을 꺼내서 화장을 고쳤다. 마스크를 썼다 벗었기 때문에 뭉쳤을 수 있다. 오늘따라 머리가 부스스한 것 같았다. 아, 머리 묶고 나올걸.
케이크를 편하게 먹기 위해, 아니 그 핑계(?)로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마치 미식가라도 된 것처럼 음식 맛을 음미했다. 디저트를 음미한 건지, 그와의 좁혀진 거리 사이의 핑크빛 공기를 음미한 건지는 확실치 않다.
디저트를 먹으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 시간이나 떠들었다.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책을 안 볼 순 없었다. 그래도 가져왔는데. 나는 이제 책을 보자고 했고, 우리는 '굳이' 자리를 이동하지 않고 나란히 앉아 각자의 책 속으로 들어갔다.
대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도 잠시 들었다.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만나서 8할은 꽁냥 거리다 귀가하던 그 시절.
풋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이클 샌델의 책을 가지고 왔는데 마침 내가 비판적으로 읽은 책이었다. 우리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꼬리의 꼬리를 물다가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트랜스젠더를 바라보는 그와 나의 시각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는 흥분했는지 조금은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본인의 신념이 확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정돈되지 않은 언어를 정돈해가며 경청했고, 최대한 차분히 나의 생각도 전달해 보았다.
여기서 그가 더 이를 악물고 공격적이었다면, 아마 오늘이 마지막 데이트가 됐을 거다. 제발 똥고집이 아니길 바라면서, 그와 반대되는 입장인 나의 의견을 전했다. 다행이었다. 그는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 같았지만 그렇다고 꽉 막히진 않은 듯했다. 충분히 내 이야기를 듣고,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확실하지만 유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대화는 다행히 불편하게 흐르지 않았다. 다만, 만약 잘되어서 사귀다가 어떤 이유로 부딪치는 부분이 생기면, 왠지 크게 싸우고 헤어질 것 같다는 짧은 상상을 잠시 하기도 했다. 내가 그를 오해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만 짧은 토론은 분명 즐거웠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이야기하고, 나 또한 상대방의 관점으로 사안을 바라보고 내 신념을 재고해보는 일. 그런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만난 건 정말 오랜만, 아니 처음일지도 모른다. 호불호가 확실한만큼 한번 '호'면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나는 '호' 인 것 같은데 변할까? 변하지 않을까?
카페에서 나와 식당을 갔다. 그는 내가 한식류, 건강식을 즐긴다는 걸 기억해뒀는지 한정식 식당을 알아본 듯했다. 음식은 맛있었고, 그는 친절했다. 그 가게는 다 먹고 커피까지 후식으로 주었다. 대기 진동벨을 받아 들고 가게가 꾸며놓은 미니 수목원에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가 계산하는 동안 내가 진동벨을 챙겼다. 배부르니 왠지 급 어색해졌다. 조용히 서 있는데 갑자기 그가 내 손에 있는 진동벨을 뺏어갔다. 뭐지? 하고 바라보려는 찰나,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엄청 긴장된 표정으로.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
"갑자기 손을 왜 잡으세요 ㅋㅋ"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진 게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그가 민망하지 않게 바로 이어 말했다.
"손 잡고 싶었어ㅋㅋ?"
그는 "응!" 이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귀엽게.
싫지 않았다. 너무 귀엽게 고개를 흔들어서 그런가.
되게 어색한 모양으로 손을 잡고 미니 수목원을 한 바퀴 돌았다. 마치 영화처럼 그 안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그는 갑자기 아무 말이 없어졌고 우리는 어색하게 손잡고 한 바퀴를 돌았다. 저 끝에 흔들의자가 보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흔들벤치에 앉았다.
앉으면서 잡은 손이 떨어졌다. 애초 이상한 모양새였기에 손목이 편치 않았을 거다. 우리는 잠시 손을 떨어트렸는데 그는 다시 잡지 않았다. 살짝 기대했는데...
왜 다시 잡지 않지? 약간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본능을 자극시켜놓고 이렇게 싱겁게? 고백하건대 나는 밝히는 여자다.
타이밍을 봐서 이따가는 내가 그의 손을 먼저 잡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커피를 알리는 진동벨이 울렸다.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음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