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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상원 Sangwon Suh Aug 21. 2016

소셜 미디어 시대의 존재론

커뮤니케이션과 기록이 주는 덧없음에 대한 위로

요즘은 누가 어디서 무슨 음식을 먹었고, 무슨 신상을 구매했으며, 누구를 만났고, 어디를 다녀왔는 지를 맘만 먹으면 클릭 몇 번으로도 훤히 알 수 있다. 소문난 맛집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동네 분식집에서 혼자 라면을 먹어도 SNS에 사진을 올린다. 개개인의 일상이 페북, 카톡, 인스타, 트위터, 텀블러, 스냅챗, 라인, 각종 블로그 등을 통해 시시각각 전 세계에 속속들이 공개되는 소셜 미디어 시대다.


2016년 5월 Facebook의 발표에 따르면 따르면 한 달에 한 번 이상 페북에 접속하는 사용자가 전 세계적으로 약 16억 5천만 명에 이르고 이들 사용자는 매일 평균 50분을 페북에 소비한다고 한다. 이를 시급 만원의 유휴노동 비용으로 따지면 매일 약 14조 원이 페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외부세계와의 소통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까? 그저 정보통신기술이 만든 한 시대의 사치스러운 유행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 만약 SNS에 열심히 일상을 올리고 '좋아요'를 누르는 소셜 미디어 시대 현대인이나 기원전 30,000년 동굴 벽화를 그렸던 선사시대 우리 조상이나 그 동기가 별로 다르지 않다면 말이다.  

기원전 30,000년경 Chauvet-Pont-d'Arc 동굴 벽화. 수 많은 손들과 이들을 이어주는 선은 무엇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source: Wikimedia)

존재에 대한 의문을 탐구하는 철학의 분야를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322BC) 이후 많은 철학자들이 존재의 의미를 고민했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가 언어라는 기호-논리 체계를 매개로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 러셀(Bertland Russel: 1872–1970)이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과 같은 언어 철학자들에게 형이상학은 언어 사용에 대한 혼란(confusion)에서 비롯된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자들이 오랫동안 매달려 왔던 질문, "존재란 무엇인가?"의 답은 간단히 "사람들이 '존재'라는 단어를 쓰는 대상"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존재'라는 단어를 사용해 의미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존재이며,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편적인 약속이기 때문에 '존재'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혼자 아무리 머리 싸매고 고민해 봐야 알 수 없고, 대신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를 파악함으로써, 실증적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견해다. 한 마디로, '존재'의 의미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따라서 사전에 나와 있는 '존재'라는 단어의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오스트리아 태생의 언어철학자.

그러면 실존(實存)은 말 그대로 내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이고 정체성(停滯性)에 대한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실존이 존재의 유무를 다룬다면, 정체성은 존재의 성격, 즉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다룬다. 그래서 이 두 문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두 물음은 인간에게 있어 아주 궁극적인 물음이면서 어찌 보면 참 덧없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 물음들이 궁극적인 물음인 이유는 인간의 고뇌 깊숙이 항상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고, 덧없는 이유는 인간 존재와 정체성이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덧없음이란 의미의 Vanitas (Adriaen van Utrecht). 젊음, 부귀를 상징하는 꽃과 금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빈잔의 대비로 삶과 욕망의 덧없음을 표현했다

또한 실존의 문제는 존재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면, 존재의 증거가 없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적어도 존재를 의심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블랙홀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중력렌즈현상을 통해 그 존재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고, 고로 존재한다. 블랙홀의 중력렌즈현상 (Alain r, wikimedia).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정체성을 어떻게 감지하고 재확인하나?


첫째, 오감(五感). 오감을 통해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 감각의 주체만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의 결정적 증거다. 또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감탄하는 것, 좋은 음악을 들으며 감동하는 것,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포옹하며 안도하는 것, 그윽한 꽃 향기를 맡고 행복을 느끼는 것은 모두 오감을 통해 나의 존재, 그 ‘살아있음’을 다시 확인하는 행위다. 오감을 통해, '살아 있음'에 대한 재확인을 통해 우리는 존재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시적으로나마 해소한다.

둘째, 기억. 과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사람은 설령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오감으로 느끼더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기억은 과거에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자료를 저장하고 그를 바탕으로 앞으로 내가 누구여야 하며, 따라서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의 기준을 설정한다. 기억은 따라서 한 순간, 한 순간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나의 정체성의 기원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미완(未完)의 답을 얻는다.  

셋째, 후손. 자손은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존재의 궁극적 정지선을 뛰어넘어 한 개체의 유전 형질의 일부를 후대에 전함으로써 사후에도 한 개체의 존재 증거, 정체성의 일부를 세상에 남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증거이며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물려받은 후손을 통해 유한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위로받는다.    

넷째, 외부세계와의 커뮤니케이션. 외부세계와 소통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외부세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외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또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믿고 따르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재확인하며 위안을 얻기도 하고, 또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존재의 불안에 대한 위로를 구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사람은 자신이 이룬 업적, 축적한 부(富), 소유한 재물 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간접적으로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중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은 선사시대나 지금이나 내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하고, 덧없는 삶의 위로를 얻는 중요한 도구다. 무엇보다도 커뮤니케이션은 ‘나’라는 개체에 한정되어 있던 존재와 정체성의 공간적 경계를 개체 밖까지 확장시킨다. 또 문자, 조각, 그림, 사진, 녹음, 디지털 미디어와 같은 기록으로 남으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읽히고, 보이고, 만져지고, 들려져 작자의 존재와 정체성의 흔적을 오랫동안 지속시킨다. 커뮤니케이션과 그 기록은 존재와 정체성의 문제를 ‘나’라는 공간적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고, 죽음이라는 시간적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시킨다. 커뮤니케이션은 따라서 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가장 자유롭고 영속적인 위로라 할 수 있다.

죽은 남편에게 쓴 원이 엄마의 편지가 관 속에 뭍혀 있다가 400년 만에 발견되었다. 소통에 대한 갈망은 현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출처: 디지털 한글 박물관).

요컨대, 기원전 30,000년 동굴 벽화 건 요즘 페북에 올린 셀카 건 그 본질은 죽음과 함께 영원히 소멸될 경험, 감정, 소망을 외부세계와 나누고, 이를 통해 내 존재와 정체성을 외부세계로부터 다시 확인받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갈망의 표현이다.


우리는 SNS를 소비하면서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존재에 대한 불안,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 유한한 삶의 덧없음에 대한 위로를 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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