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3월
어린이집에서 너를 처음 만났던 그 날 이후의 감정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모두가 어린 꼬맹이였고,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할 것도 없는 나이였다.
그저 우리는 같은 반, 같은 공간에 함께 놓여진 작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것도 있고, 이상하게 마음속에 남는 것도 있다. 너는 그중 후자였다.
그때 남자아이들은 다간이나 썬가드 같은 변신로봇 만화에 열광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색연필로 슥슥 그려낸 기계들의 모습에 눈을 빛내며, '착한 놈'과 '나쁜 놈'을 나누어 역할놀이에 몰두했다. 서로 칼싸움도 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자기들만의 법칙을 만들었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세일러문이나 웨딩피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반짝이는 드레스와 마법의 지팡이, 아름다운 노래와 화려한 변신이 담겨 있었으리라. 그래서인지, 우리들은 서로 데면데면했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노는 건 그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가 3월에서 4월로 넘어가는 이른 봄날이었던 것 같다. 창문 너머로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고, 작은 마당 가장자리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었다. 어디선가 멀리 노랫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교실과 마당 사이를 흘러갔다.
"상진아, 여기!"
뒤돌아보니 너였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 살짝 바람에 흔들리고, 두 손을 조심스레 내밀며 내게 다가왔다. 너의 손에는 작은 풀 반지가 얹혀 있었다. 토끼풀로 조심스럽게 엮어 만든 작은 고리.
"이거, 뭐야?"
나는 괜히 무심한 척 물었다.
너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거 반지야! 반지도 몰라?"
내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지만, 괜히 투덜거리고 싶었다.
"이게 풀이지, 무슨 반지야! 반지는 반짝반짝 빛나는 게 반지지."
그 말에 너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다가 다시 웃었다.
"아니야! 손가락에 이렇게 끼우면 다 반지야!"
그리고는 다시 여자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갔다. 너의 등 뒤로 햇살이 흩어지고,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그날, 어쩌면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여자아이와 이야기하며 괜히 툴툴거린 날이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마음속에는 그렇게 남아 있다.
그때부터 너를 조금 더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너는 나보다 키가 조금 컸고, 항상 양갈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웃을 때 나는 맑고 청명한 소리, 마치 실개천 위로 떨어지는 작은 빗방울 같았다. 그 웃음소리가 좋았다.
지금 사진을 보면 그렇게 예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땐 그렇게 눈부셔 보였을까. 마음의 빗장을 처음 열어젖힌게 너여서였을까. 아이의 마음은 참 신비하다.
그날 이후, 나는 집에서 몰래 웨딩피치 비디오를 빌려 보기 시작했다. 네가 좋아하는 만화를 알면, 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 조심스럽게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화면 속에서 반짝이는 소녀들이 변신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너를 알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다.
우리 반, 열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기린반 속에서, 봄꽃이 피는 그 계절에 너는 처음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승철이가 언제나 으스대며 나서던 자리 옆에서, 한나와 수지가 손을 잡고 속삭이던 그 틈에서, 너는 조용히 웃으며 눈에 들어왔다. 성열이는 종종 장난을 치다 선생님께 혼났고, 다른 여자아이들이 인형놀이하며 까르르 웃던 풍경 속에, 너는 언제나 빛났다.
우리 어린이집엔 사슴반과 기린반의 나이가 같았기에 언제나 티격태격 싸움을 벌였다. 우리는 사슴보다 기린이 크니 우리가 낫다고 했고 사슴반 아이들은 자신들이 더 많으니 더 낫다고 했다.
나는 그때마다 늘 뒤에 서서 조마조마 지켜보다가도, 너의 시선이 닿는 순간 괜히 어깨를 펴고 나섰다.
"상진아, 싸우지 마!" 하고 외치는 네 목소리가 들릴 때면, 무언가 멈칫하게 됐다. 나를 말리는 너의 표정이 그토록 진지할 줄은 몰랐다.
그 후 며칠이 지나고, 다시 마당 한켠에서 너와 마주쳤다. 내 손에는 작은 로봇 장난감이 들려 있었고, 너는 또 다른 풀 반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상진아, 오늘은 두 개 만들었어! 하나는 너, 하나는 나. 우리 둘 다 껴야해."
나는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하게 떨리던 마음을 느꼈다. 그저 둘 다 껴야한다고 한 말이었는데, 그게 왜 그렇게 따뜻하고 묘하게 쑥스러운 건지.
풀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주던 너의 손끝이 참 따스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손가락에 걸린 초록 고리가 내내 눈에 밟혔다.
며칠 후 비가 살짝 내리던 날, 너는 빗속에서도 뛰어다니며 웃고 있었다. 나는 문득 우산을 들고 다가가서 조심스레 물었다.
"비 맞으면 안 추워?"
너는 고개를 저으며 방긋 웃더니 이렇게 속삭였다.
"비 맞으면 더 예뻐진대. 엄마가 그랬어. 비 맞은 꽃이 더 향기롭다고."
그 순간, 내 마음속에도 작은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마당의 노란 민들레, 살짝 흐르던 봄바람, 저 멀리 지는 해. 그 모든 풍경 속에서 너는 나의 작은 비밀처럼 점점 커져갔다. 너를 바라보는 시간은 언제나 짧게 느껴졌고, 헤어지고 돌아서는 길은 언제나 길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