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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이야기

1997년 3월

by 만수당

퍼져가는 바람에 내 옛날이 등불처럼 번졌다.


나는 전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도로가 반듯하게 나 있고, 집들은 층층이 올라간 아파트로 바뀌었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그곳은 아침이면 장독대 위로 김이 피어나고 저녁이면 온 동네에 밥짓는 냄새가 들리는

그런 마을이었다.


멀리 모악산은 큰 들을 가득 품고 있었고 마을 바로 뒤의 계룡산은 든든히 빈 들이 새어나가지 않게 버티고 있었다.


모악산과 계룡산을 따라 펼쳐진 너른 들과 개천들 사이로 논과 밭이 줄을 지어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 끌려 논두렁을 걷다 보면
'찌르르'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발밑에서 들리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바람 소리 속에 산새 소리도 묻어나왔다.


"상진아, 저 산 넘어 뭐가 있는지 아니?"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쥐며 물으면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대답했다.

"아프리카!"

그러면 아버지는 웃으셨다.


"아프리카? 사자 보고싶나보네~"


내가 알던 세상은 아침마다 마을 어귀 큰 돌에 모여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발을 흔들며 웃던 그 풍경이 다였다. 그 돌은 내가 본 돌 중에 가장 크고 둥글었고, 이름 없는 풀들이 비비고 자라 그 위에 눕곤 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어른들도 그 돌을 그저 큰 돌이라고만 불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큰 돌은 고인돌이었다.


나와 동네 아이들은 아침밥을 먹고 나면 으레 큰 돌에 모여 놀았다.

돌 위에 올라가기도, 돌 아래에 한 명이 들어갈 작은 집을 잇대 짓기도 하였다.


동네아이들도 오랜 혈연으로 뭉쳐있어 촌수를 헤아려보면 대개 6촌에서 8촌 사이의 아이들이 많았다.


봄이 오면 우린 뒷산인 계룡산으로 놀러 다녔다. 산 위에 핀 진달래를 꺾어 머리에 꽂아보기도 했고 약수터에 가 한웅큼 찬물을 마시기도 했다.


풀잎 사이에서 무당벌레가 기어 나오고, 작은 개울에는 송사리가 바글거렸다.

"얘들아, 잠깐 멈춰봐!"

누군가 소리치면 모두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개울을 들여다봤다.
물 위로 햇살이 반짝이며 부서지고 그 속에 이름 모를 작은 생명들이 꿈틀댔다.


모내기 전, 물을 받아놓은 논 위에서 바지를 걷고 진흙놀이를 하는 것도 빠지지 않았다. 우리는 맨발로 그 안에 뛰어들었다.


"으아아! 시원해!"

진흙이 발가락 사이를 스르륵 타고 오르면 마음까지 시원해졌다.
그러다 미끄러져 주저앉아 온몸에 진흙칠을 하고 해가 기울 무렵에야 밥 짓는 냄새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의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또 진흙가지고 놀았어? 어디서 옷을 또 다버리고 온거야~"

그러면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애들이랑 놀다가 그랬어요."


엄마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시고

"참말로, 상진이는 산도 물도 다 친구구나." 하시며 내 등을 토닥이셨다.


가을은 황금빛 물결의 계절이었다.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면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사르르, 사르르 춤을 췄다.
우리는 나락을 거두어 낸 빈 논 사이를 헤집고 쌓아둔 볏집 뒤에 숨어서

"찾아봐라!"


하고 숨바꼭질을 했다.


낙엽 밟는 소리가 그렇게 경쾌하고 웃음소리와 섞이면 세상에 걱정 하나 없었다.


겨울이 오면 마을에 쌓아둔 흙언덕이 눈썰매장이었다. 비료포대를 타고 달리다가 때로는 넘어진 채 굴러가기도 했지만 뺨에 눈이 닿으면 얼얼해도 그저 웃음이 났다.


"내려와 봐! 이번엔 내가 먼저 간다!"


친구의 소리에 모두 박수를 쳤다.


밤이 되면 마을 어른들이 우리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쳤다.

작은 손으로 꽹과리를 두드릴 때면
"그렇지! 바로 그 맛이여!"
하며 웃던 빨갛게 삭아버린 광대 위로 어른들이 하회탈처럼 웃었다. 대보름이면 달집을 태우고선 빈 논 위에서 돌리던 쥐불의 붉은 빛, 그 불꽃을 바라보며 우리는 풍년 대신 매일같이 놀기만을 기도했다.


가끔 혼자 방 안에 누우면 베란다 창으로 비친 물그림자를 바라보며

나는 세상 끝 어딘가의 바다를 떠올렸다.


'저 바다 건너에도 내가 살고 있지 않을까?'

내 안에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내가 있을 것 같았다.

말로는 할 수 없어 달력을 찢어 그 뒤에 연필로 마음속 세상을 그렸다.


나는 그렇게 혼자인 채 자랐고 함께 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친구인 준하 어머니의 권유로 처음으로 어린이집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어린이집은 당시 지은지 1,2년 정도 밖에 안된 4층 건물이었다. 앞에는 우리집 마당보다 좁은 마당이 있었는데 한켠엔 아름다운 꽃들로 조그맣게 화단을 만들었다.


바로 옆 부지가 보신탕집이라 언제나 개짖는 소리가 들렸고 간혹 길 잃은 강아지들이 어린이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나는 6살에 해당하는 기린반에 배정되었다.

네 살은 다람쥐반, 다섯살은 토끼반, 여섯살은 사슴반과 기린반이었고 일곱살은 코끼리반이었다.

열 명 남짓한 아이들 틈에 끼어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세상에 대한 첫 두려움을 마주했다.

그때 너를 처음 봤다.
너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남국의 바람처럼 따뜻했다.


"안녕, 너 이름 뭐야?"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상진이."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세진이야. 윤세진. 우리 친구 하자."


그때 나는 알았다.
세상은 넓고 낯설지만
누군가 먼저 손 내밀어 주면
그곳도 금세 내 놀이터가 된다는 걸.


돌이켜보면,
내 삶을 바꾼 첫 바깥 세상의 친구는 바로 너였다.
내게 바다를 상상하게 한 작은 물그림자처럼,
너는 내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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