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

여느 이야기

by 만수당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먼지를 일으킬 만큼 거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흔들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지도 않았다.

창문을 스치며 방 안으로 스며든 찬 공기는 어렴풋 지난 계절을 실어왔는지 제법 무거웠다.


바람이 봄부터 꽃을 실어날랐는 지, 여름의 땀냄새까지 함께 실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바람은 향기로웠고 제법 축축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의 냄새 속에는 오래된 기억이 묻어 있었다. 어릴 땐 그것이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손끝에서 새어 나가듯 사라진 순간들을 헤아릴 수도 없었다.


많은 기억이 부초처럼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지나간 계절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어떤 이는 오래전 첫눈처럼 포근했고, 어떤 이는 거센 장마처럼 한바탕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 계절의 얇은 편린 위에서 나는 사랑을 알았고, 사랑을 잃었으며 또 지나쳤다.


그렇게 여러 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마주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의 기억은 아득하다. 그러나 선명하다.


올이 선 기억은 제가 잊혀질 양이면 언제든 무시로 내 머리를 치며 자신을 남겼다. 다만 시간이 지난 것은 어쩔 수 없어 오래된 책장 속 곰팡내처럼 어렴풋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 지금 내가 잡아챌 수 있는 첫 기억 속에서도 너는 서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 짙은 눈동자, 햇살 아래 투명하게 빛나던 긴 머리카락.


우리는 같은 어린이집에서 자랐고, 같이 길을 걸었으며, 같은 계절을 몇 번이고 지나왔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너는 또 나에게 삶을 함께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너는 먼저 걸어나갔고 나는 바보같이 지켜보았다.

나는 매서웠고 너는 그저 안아줄 뿐이었다.


짚 태우는 연기가 멀리 밥냄새를 품고 퍼지듯 눈을 뜨니 너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백일장에서 너를 만났다.

나는 너를 우연처럼 만났고, 너와의 인연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너의 글은 나와 달랐다. 나는 아직 세상을 다 알지 못하는 어설픈 글을 썼지만, 너는 짧은 시 속에 네 이야기를 풀어냈다. 너의 문장 속에는 너의 세계가 있었고 나를 끌어당겼다.


그때에 나는 소설을 썼고 너는 시를 써내렸다.

처음 본 날, 너의 마지막 문장은 '오늘 밤 나무 한 그루 내게 말 걸어주면 좋겠다.' 였다.

수상 따윈 안중에도 없이 처음 본 아이들은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같은 꿈을 꾸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너와 나의 문장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아직도 네가 언제 멀어졌는지 이유는 알지만 그 시간의 배열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마지막으로 너의 글을 읽던 순간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리고 네 마지막 문장이 또 나를 할퀴었다.


"너는 몰랐니? 나는 알았는데."




모든 감정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감정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저 조금 더 특별한 마음,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 조금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이었음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나는 그런 감정을 너에게 느꼈다. 많은 것을 함께 겪었다.


웃고,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웃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고 철 지난 옛 노래를 흥얼거렸지만

아무 것도 남은 것은 없었다.


나에게 서운해 아이처럼 펑펑 울어 내가 안아주던 겨울 날도

담배피지 않겠노라 약속하고 손을 꽉 잡고 가을 날도

알바하는 네 옆에서 쪼그려 곤히 자던 여름 날도

영화에 집중하던 너를 보며 가만히 미소짓던 봄 날도


그냥 스쳐간 기억이고 버려진 시간이었을 뿐이다.


가끔, 선택이 다르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그 선택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너와 함께한 날들이 내 삶에서 가장 재밌었던 시간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겨울의 너,

너와의 시간은 짧았지만, 퍽 깊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너는 내게 사랑을 주었고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 없이 떠났다.


얼굴도 보지 않고 하루 온종일 전화하던 그 어린 여고생의 목소리가,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라 아직도 떨리고 무섭다.


어느 날에이던가, 아마 찬바람이 오늘처럼 부는 날 즈음, 너는 내게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우리 또 언제 볼까요?"


너는 나보다 어렸지만 나보다 깊었다.

영영 사라져버려 잡을 수도 없는 길 위에서 너는 내게 아직도 그대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


한 번도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 마지막 사랑이 너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던 네가 있었다.


십 년을 무던하게 지내왔고 갈피없는 한 가닥 줄 위에서

너와 나는 항상 서로를 기댔고 서로를 위했다.


너는 네 이름처럼 어둠을 살라먹고 새벽을 여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남은 희망이자 너에게 남은 확신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나는 이제 흘러간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나 혼자만 기억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냈고, 나는 내 자리에서 그들을 기억한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내 안에는 그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지나간 사랑을 다시 돌아보며,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로 사랑했을까? 그때의 감정들은 지금도 사랑이라 불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남았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불어온다. 먼지가 흩날리고,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으면 안되는 너의 이름들을 떠올린다.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