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4월
그날 이후 봄은 내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계절이 되었다.
어린 마음에 손을 맞잡고 돌아오던 버스 안의 그 따뜻한 촉감은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번져들어올 때마다, 손바닥 속에 남은 너의 온기가 다시금 살아나는 듯했다.
그 온기는 마치 겨울 끝자락의 작은 화롯불처럼 조용히, 그러나 오래도록 내 마음 깊숙이 남았다.
집에 돌아와 창가에 앉아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손바닥 위에 남은 미세한 떨림, 마치 벌이 기어다니는 듯한 간질거림, 그리고 가끔 느껴지는 찌르르한 전류 같은 감각은 너무나 생생했다.
나는 그 자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아린 듯 시큰거리는 마음이 따스하게 저려왔다.
다음날 어린이집에 가자, 넌 빠득거리는 햇살 속에서 내게 달려오며 두 눈 가득 빛을 담아 소리쳤다.
"상진아, 우리 소꿉놀이 하자! 내가 엄마고 너는 아빠야!"
순간 내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내 안에 자리하던 묘한 감정이 부끄러움과 낯섦으로 변해버렸다.
"야, 윤세진! 내가 왜 아빠고 니가 엄마야!"
하지만 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어제 손잡고 반지도 줬잖아! 그러니까 우리 이제 결혼한 거야!"
나는 뭔가 지는 것 같은 기분에 괜히 투덜대며 말했다.
"그거... 버렸거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너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걸 봤다. 눈가가 붉어지더니 금세 눈물이 맺히더니 작은 어깨가 흔들리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흐으엉...! 나빠!"
주변 여자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상진이 나빠! 세진이 울렸어! 못됐어!"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작은 발끝만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반지를 버린 일보다도 너를 울게 만든 내 말이 더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실은 버리지도 않았고 엄마한테 자랑하며 집에 고이 두고 왔는데..
그러다 넌 눈물을 닦으며 내게 다시 다가왔다. 어린 네가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용히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또 만들 거야. 우리 다시 결혼하면 돼!"
그러고는 내 손을 잡아끌며 장난감 바나나를 내 입에 물리고 웃었다.
"먹어요, 여보! 맛있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아침마다 어린이집에 가는 길이 설렜다. 길가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 너의 웃음소리가 떠올랐고, 빗소리가 들리면 빗속에서 우산도 없이 뛰어다니던 네 모습이 스쳐갔다.
비 내리던 어느 날, 어린이집 앞에 도착했을 때 넌 분홍색 작은 우산을 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모습이 보이자 두 눈을 반짝이며 달려왔다. 이번에는 비를 맞고 있지 않았다.
"같이 쓰자! 비 맞으면 안 돼!"
우산 하나 아래에서 어깨를 맞대고 걷는 그 짧은 거리. 불과 몇 걸음이었지만, 내 심장은 두근거림을 넘어 쿵쾅거렸고, 빗속 향기와 너의 샴푸 냄새가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렇게 너와 같이 살아내는 여섯 살의 봄이 지나갈 무렵, 하루는 어린이집 마당에서 뛰다가 넘어졌다. 무릎이 까지고 흙이 묻었지만, 그보다 더 창피함에 눈물이 터졌다. 그때 네가 다가와 무릎을 꿇고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상진이는 너무 울보야. 남자는 울면 안 돼. 멋진 아빠는 울지 않는 거야."
그 말이 내 어린 가슴에 깊게 박혀서 아직까지도 난 눈물이 말랐다.
너는 강한 사람이 너의 옆에 있길 바랐고 나는 언제나 유약하였다.
눈물이 먼저 앞섰고 먼저 싸우질 않았다. 울보라는 소리를 듣고 한동안 너와 이야기를 하질 않았다. 네 앞에 서는게 그 어린 나이에도 창피하였고 머쓱했다. 그러기를 일주일이 지났다.
당시 아이들이 어느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해 어린이집에서는 서로 원하는 사람끼리 짝을 만들어주고 역할놀이를 시키곤 했다. 오늘은 늘 그렇듯 아빠엄마가 되는 소꿉놀이였다. 그때 박승철이 먼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나! 나 세진이랑 결혼할래! 내가 아빠 할 거야!"
내 속이 들끓었다. 질투와 분노가 밀려왔지만, 입술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인지, 혹은 두려움 때문인지. 나는 뒤에서 너의 뒷모습을 몰래 지켜보다가 네 뺨이 보일 때 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결국 너와 박승철이 부부가 되었고, 나는 짝이 맞지 않아 선생님 옆자리에 앉아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이 '여보'라고 부르며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싫었다.
모든 놀이가 끝난 뒤, 넌 조용히 내 옆에 와서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나는 상진이가 뭐라도 말할 줄 알았는데... 바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작은 돌멩이를 발로 톡 차며 마음속에서 그 말을 수없이 되새겼다.
바람은 살랑였고, 먼 하늘 저편에서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처럼, 내 마음도 그날따라 자꾸 흔들리고 부서질 듯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