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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이야기

1997년 7월

by 만수당

봄은 그렇게 사각거리며 지나갔다.


어린이집에서는 봄꽃을 따라 여기저기 소풍을 떠났고 그때마다 내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고 과자를 샀다.


일주일에 하루씩 가는 소풍에 선생님들도 부모님들도 머리가 아팠을테지만 우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시대는 점점 말려들어가며 숨을 조이는 날이 이어졌음에도 우리는 아직 세상을 알만큼 철이 들 나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덜컥 여름이 찾아왔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에어컨이 대중화되지 않았고 매우 비쌌기 때문에 우리는 선풍기나 부채 정도로 여름을 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이 감당하기에 여름은 너무나 더웠고, 길었다.


결국 수련회를 조금 더 빨리 무주로의 2박3일 수련회가 결정되었다. 아직 꼬마들이라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2박3일이다. 우리는 처음으로 외박에 나섰다. 장소는 무주였다.


한여름의 무주는 계곡을 끼고 흐르는 바람이 걸을 때마다 자리를 달리하며 얼굴을 스치곤 했다. 나무는 그늘을 깊숙이 드리웠으며,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우리는 그날, 나이가 같은 사슴반 친구들과 함께 수련회 버스에 올랐다. 우리와 사슴반 이외에도 코끼리반, 토끼반, 다람쥐반까지 모든 아이들이 버스 세 대에 나눠탔다.


무주 수련원은 계곡 옆에 자리 잡은 다소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어린 우리들에게는 거대한 성처럼 느껴졌다. 시멘트 계단은 울퉁불퉁했고, 나무 기둥에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비밀의 놀이터처럼 설렜다. 방은 딱딱한 마룻바닥이었고, 창문 밖에는 계곡물소리 위로 풀벌레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첫날은 짐을 풀고 단체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같은 나이였던 우리와 사슴반이 매일같이 싸우기 때문일까, 선생님들은 우리들을 섞어서 조를 만들었다. 처음엔 사슴반 아이들과 같이 해야한다고 해서 싫어서 아이들이 울기까지 하였다. 다행히 조는 세진이와 같은 조였다.


"상진아, 나는 너하고만 손잡을거니깐 너도 다른 애랑은 손잡으면 안돼! 알았지?"


세진이는 내 손을 꼭 잡고서 당부했다. 세진이도 낮선 아이들과 손 잡고 놀기는 싫었나보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지 오분도 안되어 나는 다른 아이에게 손을 내줬다. 다같이 둥글게 모여앉아 손을 잡으라는 말 한마디에 세진이가 당부한 말도 잊고 그냥 생각없이 잡은 탓이었다. 더군다나 사슴반의 박소윤 손이다.


나는 소윤이의 손을 잡았다가 바로 풀며 세진이의 눈치를 살폈다.


아, 괜히 잡았다.


그 후로 저녁이 다가도록 세진이는 토라진 얼굴로 나를 보질 않았다. 나는 첫 외박나와서 또 그렇게 불안에 떨며 잠을 청했다.


계곡에서 한 물놀이는 둘째 날의 하이라이트였다. 계곡은 차가웠고, 발을 담그자마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시렸다. 하지만 곧 익숙해졌고, 우리는 물장구를 치며 물을 튀기고, 돌 위에 앉아 서로를 밀어 빠뜨렸다. 세진이는 유난히 물을 잘 탔다. 물론 아직 화가 풀리질 않아 세진이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도망치기 일쑤였다.


물놀이가 끝나고 큰 나무 사다리 앞에서 수박을 먹었다. 수박은 언제나 여름의 상징이었다. 그때 세진이가 자기가 먹던 수박 조각의 씨를 뱉지 못해 머뭇거렸다. 땅에 뱉긴 뭐하고 뱉을 휴지 따위가 안보여서 계속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듯 보였다. 이떄다 싶어 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여기다 뱉어." 그 순간, 부끄러웠지만 오랜만에 다시 팔불출이 된 것 같아 좋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세진이는 이제야 화가 풀린듯 내 손에 제 수박씨를 뱉었다. 그 손바닥엔 붉은 수박즙과 까만 씨들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퍽 깨끗한 기억은 아닌 듯 도 싶다.


수련회 셋째 날엔 '용기 훈련'이라는 이름의 활동이 있었다. 긴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줄을 타고 내려오는 고난이도 과제였다. 나는 아래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망설였다. 단짝친구인 인제 먼저 올라갔고,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발이 떨렸지만 뒤에서 소윤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진아! 할 수 있어! 여기 다 하고 있잖아!"

소윤이는 언제나 씩씩했다. 머리를 뒤로 질끈 묶었고, 커다란 눈은 언제나 반짝였다. 다른 아이들이 머뭇거릴 떄도 소윤이는 항상 앞장섰다. 다만 그 친구는 사슴반이라 친하게 안지냈는데 이번 수련회 때 와서야 서로 이야기하고 친해졌기에 나 또한 응원해주는 듯 하였다. 소윤이 목소리가 잦아들기 무섭게 세진이 목소리도 들렸다. "상진아! 빨랑!" 그래, 세진이가 부르니깐 가야지. 그 목소리에 용기를 얻어 나는 한 발, 또 한 발 사다리위에서 밧줄을 잡았다. 팔은 후들거렸고, 땀은 등줄기를 타고 흘렀지만 밧줄을 잡고 내려올 때, 나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소윤이가 밑에서 박수치며 소리쳤다. "와 상진이 멋졌어! 완전 최고야!" 그리고 안아주는 소윤이의 어꺠 뒤로 다시 얼굴이 벌개진 세진이가 보였다. '아, 박소윤 얘는 왜 또 나를 안아주었는가..'


그 후로도 반딧불이를 모으던 일, 머리 둘 달린 뱀의 혀끝, 캠프 파이어 하던 일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고도 또렷하다. 문제는 세진이의 토라진 얼굴이 제일 생생한 일.


그 계절, 한 바탕 여름이 지나갈 떄 나는 참 머리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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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