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즐기는 당신께

열여섯 번째 편지

by 윰세

형제가 육 남매라고 하면 대략 몇 년생인지 알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께서도 여동생 셋에 남동생 하나를 두었고 위로 태어난 오빠들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서 동네 사람들이 당신께 ‘붓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고 하셨지요.

‘붓들이’로서 당신은 동생들을 한 명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먼 동이 트면 소에게 줄 여물을 쑤기 위해 가마솥 아래 장작을 넣고 불을 지피고 동생들 밥을 먹이고 나서 막내 남동생을 업고 험한 산길을 두 시간씩 걸어 학교에 가셨다는 말에 지옥철로 한 시간 거리의 직장이 멀다고 투덜거리는 제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고된 일상에도 즐거움은 있다고 하셨지요.

아침에 인사를 건네는 소의 맑은 눈망울이 얼마나 예쁜지, 학교를 오가는 길에 산딸기와 머루를 따먹던 맛은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고된 현재를 살아가는 힘은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보다는 누군가와 함께한 기억 속의 즐거운 추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힘들었던 시절 서로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었을 형제들이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해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의도한 마음과는 다르게 말로써 서로를 할퀴고 피를 내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팍팍한 살림살이에 쥐똥크기의 유산을 서로 가지겠다고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며 틀어진 관계에도 불가하고 당신을 바라보는 이모들과 삼촌의 눈빛에는 여전히 애잔함과 고마움이 담겨있다는 걸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막내 삼촌이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누나보다는 엄마와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당신께서 형제들 때문에 괴로울 실 때, 입술에서 나오는 말보다 그분들이 당신을 향한 눈빛을 보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 많은 마음들이 쌓여 있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원망과 투정뿐인 경우가 많지요. 특히 가족은요.

이모들과 삼촌은 어렸을 때처럼 여전히 당신의 어리광쟁이 동생이고 싶은 거겠지요?

그건 희생과 헌신을 도맡아야 하는 맏딸의 피할 수 없는 서글픈 숙명인 걸까요?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보니 당신께서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궁핍한 삶을 씩씩하게 버텨내셨다는 사실이 하루하루 실감 나고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됩니다.

아시다시피 당신은 저의 정신적 지주이자 삶의 멘토입니다.

‘정신적 지주‘라는 단어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이라는 소설 속 우르술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백 년의 고독>은 라틴 아메리카 배경의 부엔디아 집안의 백 년이 넘는 서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부엔디아 집안 가계도의 맨 꼭대기에 있는 여성의 이름이 우르슬라입니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개인적으로 우르슬라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결혼과 출산을 시작으로 집안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녀의 죽음 후에 집안이 몰락하기 때문이지요.


우르슬라는 방에 틀어박혀 돈도 안 되는 연구를 하는 남편 대신 한시도 쉬지 않고 동물 모양의 캐러멜과 빵을 만들어 팔아 식솔들의 배를 든든히 채워주고 살림을 돌보는 강인한 여성입니다.

우르슬라는 척박한 살림을 이루던 우리 할머니들을,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동생들을 교육시킨 우리 어머니들을, 그리고 당신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우르슬라는 남편과 자식, 손주들을 하늘로 먼저 떠나보내고 나이가 들어 장님이 되어서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다른 감각을 십분 발휘해 남은 가족들을 거느립니다.

집안을 돌보는 데 평생을 바친 그녀는 무더운 더위 속에서 소수의 사람들만 참석한 장례를 치름으로써 이야기 속에서 사라지지요.

우르슬라의 외로운 장례식은 인생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돌이킬 수 없는 황량함과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만이 남았고 강렬했던 금단의 사랑은 허무하게 종식됩니다.

그리고 우르슬라가 남편과 함께 손수 일군 집은 개미떼의 습격으로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며 막을 내리지요.


<백 년의 고독>에서 잔혹한 전쟁에서의 공적이 이마에 십자가를 단 자식들의 죽음으로 종결되고 불의에 맞선 사람들은 권력자의 은폐로 인해 흔적도 없이 허무하게 사라지기도 합니다.

황금을 손에 쥔 자에게는 남는 것 역시 죽음이었습니다.

미움과 증오는 그들 자신을 갉아먹고 배신과 방종은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지며 모든 행함과 내뱉은 말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주인공들을 죽을 때까지 괴롭혔지요.

부엔디아의 집안의 비극적 서사를 통해 작가가 누군가를 위한 헌신적인 희생, 신념을 위한 전쟁, 폭풍우 같은 사랑, 상대를 향해 증오는 시간이 지나면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인간의 삶은 예측할 수 없고, 위기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하며, 후회와 회한이 남지 않게 너무 미워하지도 말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너무 내려놔서도 안되고, 너무 몰입해서도 안되며, 무감정하지도 말고, 과한 참견도 삼가며, 조화와 균형을 찾으며 이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조언을 듣는 느낌이었지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울듯 말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근친상간으로 시작된 집안이 흥망성쇠를 겪어내고 마지막에 근친상간으로서 비극을 맞은 게 그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눈물이 나지 않은 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물음에 소설 속의 다양한 인물들이 ’딱히 정해진 정답은 없다.’라고 대답해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장소를 정할 수 없고, 삶은 언제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어떻게 견뎌내느냐는 각자에게 달려있는 거겠지요.

저는 통제할 수 없는 건 내버려 두고, 내 곁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보답 같은 건 바라지 말고, 현재 지금 순간에 온 마음을 쏟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백 년을 글로 적는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요?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은 ‘붓들이‘가 동생들에게 헌신하며 성인이 되어 일찍이 가정을 이루고 남편하고 자식과 지지고 볶는 서사겠지요.

당신께서 겪어온 고단한 삶이 크나큰 고독을 안겨주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 편지가 기나긴 인생의 고독 속의 즐거운 추억이 되어주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