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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희 May 08. 2020

꾸준함이 주는 힘

 매년 11월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꼭 하는 일이 있다. 2달 후면 다가올 새해의 다이어리와 일기장을 구매하는 일이다. 내년에는 어떤 다이어리와 일기장을 사용할지 온라인 서핑을 며칠씩 한다. 그렇게 며칠을 둘러보다 결국 올해와 같은 디자인의 다이어리와 일기장을 구매하는 일이 다반사이기도 하다. 그래도 다가올 해를 준비하고 마음을 다잡는 일은 세상 설레고 올해의 나를 더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일기장을 구매하고 일기 쓰기를 계속 해내려고 노력한다.


 고민하다 고른 일기장이 담긴 택배 상자가 집에 도착하면, 택배를 뜯고 일기장을 꺼내 한 장씩 넘겨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한다. ‘미루지 않고 매일 꾸준히 쓰자.’고 나 자신과 약속한다. 하지만, 종종 자기 합리화를 하며 미루는 날이 생기고는 한다. 그렇게 하루 일기 쓰기를 미루고 나면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꺼낸다. 오른손에 연필을 쥐고,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눈동자를 굴리며 한참을 떠올리다, 10줄도 안 되는 어제의 일기를 쓴다. 이럴 때마다 초등학생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른다.


 방학식을 하고 집에 돌아와 안내장을 꺼내 보면 10개가 넘는 방학 숙제가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로 3~5개를 골라서 할 수 있었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나열된 방학 숙제 목록 중에 일기 쓰기는 터줏대감처럼 항상 빠지지 않고 있었고, 나는 늘 일기 쓰기를 선택했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걸 고르고 나면 일기를 포함한 모든 방학 숙제를 미루고 또 미루며 방학을 신나게 보냈었다. 방학은 마치 하늘로 향해 올랐던 그네가 내려오는 속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었다.


 그렇게 즐겁게 놀기만 하며 방학을 보내다 항상 개학 하루 전날 밤새워가며 엄마 옆에서 눈물을 머금고, 잠과 사투를 벌이는 내가 있었다. 엄마 옆에서 일주일도 지난 이야기를 있는 힘을 다 모아 기억해내며 써 내려갔었다. 그날의 꼬마는 잠이 몰려와 점점 무거워지는 눈에 힘을 주며 '일기는 절대 밀리지 말아야지, 다음 방학 때는 일기 쓰기를 선택하지 말아야지.'라고 굳게 다짐을 하고는 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인 건지 스물아홉 살이 되어서도 일기 쓰기를 하려고 하고, 기록하는 일을 밀린다. 일기 쓰기를 밀리는 일을 매년 반복하고 있지만, 하루를 기록하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고 돈을 주고 일기장을 산다. 엄마가 사준 일기장이 아닌 내 돈 주고 구매한 일기장에 어제 기록하지 못한 순간을 쓰며 또 다짐한다. ‘다시는 밀리지 말아야지. 미루지 말아야지. 어제 겪었던 순간도, 어제의 감정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게 있으니까 절대 미루지 말아야지.’ 매 순간 꾸준함이 주는 힘을 믿으며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약속한다. 그리고 또 다시 승자도 패자도 온전히 나뿐인 도전을 한다.


‘내일은 나 자신과 싸움에서 이길 거야. 승자가 되겠어.’


 이럴 때마다 일기를 쓰는 일이 별거 아닌 듯, 제일 쉬운 일인 듯하지만 어찌 보면 어렵고 힘든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승자로 거듭나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문득 이상한 부분이 떠올랐다. 일기를 꼭 저녁에만 쓰라는 법은 없는데, 왜 하루를 마무리할 때 쓰려고 했을까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내가 일기를 미루는 이유 중 하나는 하루에 해야 할 많은 일을 해내고 나면 일기를 쓸 힘이 없는 날이 많았다. 일기를 쓰는 일도 정성이 필요하고, 내 감정을 쏟는 일인데 몸이 힘든 날은 이것마저도 벅차게 느껴졌다. 그래서 저녁보다는 정신이 맑을 때, 내 체력이 가득할 때, 상쾌하게 일기를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일기를 하루 시작점에서 쓰기 시작했다. 오늘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해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오늘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으면 하는지에 대한 문장이기도 한 하루의 시작에서 쓰는 일기. 내 도전을 조금 더 부드럽고, 벅차지 않게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계속 올해가 끝나는 12월 31일까지 꾸준히 해내고 싶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꾸준함이 주는 힘을 느낀 나를 문장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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