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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희 May 07. 2020

입버릇처럼

 고등학 시절 미대 입시를 준비 중이던 나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교복을 챙겨 입고, 학교에 가면 7교시 정규수업을 마치고 난 뒤 미술학원으로 향했다. 논과 개구리 소리가 가득한 곳에 살았던 나는 학원에서 집이 제일 먼 학생이었고, 학원 수업을 늦지 않기 위해선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저녁을 거르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갈 수 있었던 미술학원. 그렇게 학원 수업을 마치고 10시가 넘어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해주는 간식을 먹고 그대로 책상에 앉았다.


 침대가 아닌 책상에 앉아 새벽 세 시가 넘도록 미술학원 숙제를 하고, 학교 숙제를 하고, 그림에 필요한 자료 스크랩을 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느낄 정도로 해내고 나서야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세수, 머리만 감고 등교를 했다. 그리고 학교에 도착하면 사물함에 있는 칫솔에 치약을 묻혀 털레털레 화장실로 향했다. 양치하는 시간이라도 줄여서 잠을 더 자고 싶었던 나는 매일 등교 후에 학교에서 양치를 했었다. 매일 아침 학교 화장실 거울 속에는 팔목에 어제저녁 학원에서 묻은 물감을 미처 지우지 못한 채 잠든 열아홉 살 소녀가 있었고, 항상 비몽사몽 한 채로 양치를 했었다.


 안 씻은 애처럼 팔목에 물감을 묻히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등하교를 반복했던 나는 엄마에게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며 한숨 섞인 하소연을 했었다. 주방에서 간식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던 엄마는 ‘엄마 나이 되면 시간이 더 빨리 가. 나이 먹는 만큼 시간이 빨리 흘러.’라고 말했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라진다니, 아리송했다.


 10년이 흐른 지금, 열아홉의 나에게 했던 엄마 말이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난다. 요즘 나는 ‘시간이 너무 빨라. 하루가 너무 짧아.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닌다. 혼자 있을 때 도, 신랑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삼촌에게도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다.


 잡고 싶어도 잡히지 않는 빠르게 흐르는 내 시간에 마음이 조급해지다가도, 내가 이 정도면 할머니 시간은 대체 얼마나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건지 째깍째깍 시곗 소리가 야속하기만 하다. 매일 초바늘이 1초가 아닌 10초에 한 번씩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 더 많은 일을, 오늘 하루 해내야 하는 일을 조금 더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욕심이 생긴다.


 언제쯤 입버릇처럼 말하는 시간에 대한 투정을 멈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계가 아닌 점점 늦어지는 일몰을 보며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뭇잎 색이 변하는 가을이 오기 전 내 입에 유연한 삶을 살 수 있는 다른 문장이 매일 맴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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