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자기소개서, 고등학교, 대학교 성적, 졸업증명서, 유학용 은행잔고증명, 비자용 신체검사서, 비행기 티켓, 여행자 보험 등등... 새로 준비해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였다. 물론 모두 영문증명에 곱하기 세명 분, 나하고 아들 둘. 아내는 신체검사까지 받았으나 일단 한국에 남기로 했다. 앞 일은 알 수 없으므로 거기다 아무 연고도 없는 캐나다에서 일이 안 풀려 다시 돌아오는 경우를 대비해서 일단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계속하기로 했다.(마음이 짠했다.)
운영하던 작은 사업체를 어찌어찌 운 좋게 후임 사장님에게 넘기고 이젠 진짜로 이민을 위한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아내는 점을 봤다. 보통 때 일 추진력은 웬만한 재벌 2세 못지않으면서도 이렇게 처음 시작해서 아무 데도 비빌 데가 없다 싶으면 세종시에 사는 절친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는 몇몇 용한 점쟁이(요샌 무속인이라고 해야 하나?)들을 알고 있는데 그중의 한 명을 아내에게 추천해 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나는 사주에 무슨무슨 기운이 많아서(적어서였나?기억이 안 난다.)한국에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단다.(오!! 이거 뭐야. 내 느낌이 실제로 맞았던 건가?)그 기운을 낮추기 위해서는(또는 높이기 위해서는) 환경을 바꿔주는 게 좋은데 이민도 아주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단다.(여기서 신뢰도 하락-1번, 아내가 이민 얘기를 했을 듯) 또 예순이 되면서부터 잘 풀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단다.(신뢰도 하락-2번, 이건 희망고문)불안함이 조금 사라졌는지 아내는 한결 밝아졌고 뭐 어쨌든 좋다는 얘기니 나 역시 부정적인 요소가 늘어나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심플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다 보니 정리해야 할 것들이 없진 않았다. 그중 대부분이 버리거나 끝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의 마음 한구석에 넣어두고 상대에게는 좀 봐달라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같이 늙어가는 친구들, 여러 인연으로 맺어져 지금의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지인들, 사랑하는 나의 엄마, 늘 세심하게 엄마를 챙기는 누나, 아들보다 훨씬 더 큰아들 같은 매형(하던 대로 어머니 잘 모시면 되니까 넌 절대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라던) 이들과의 이별이 그것이었다. 특히 누나와 매형에게 많이 미안했다. 엄마를 그들에게 온전히 맡긴다는 것, 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니까.
짐이 엄청 많아졌다. 잠깐의 여행이 아니라 살러 가는 거니까 요모조모 꼼꼼하게 챙기다 보니가져가야 할 물건들이 엄청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몸무게 재는 저울로 가방마다 한도를 초과하지 않도록 일일이 재면서 마지막에는 가방 손잡이마다 눈에 잘 띄는 줄을 묶어서 분실을 방지했다.
짐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니 이제 납골당에 계시는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과 차례차례 이별을 해야 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안 좋고, 그럴 이유가 없는데 괜히 미안하고(이건 정말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동지들을 버리고 떠나는 독립군 같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ㅋㅋ)그랬다.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은 짧게나마 강릉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언제 다 같이 갈 수 있을지 모르니...
공항에 데려다준다는 아내를 한사코 만류하고(뻔하지 않은가. 공항에서 가족의 이별 장면이란)나와 아들 둘 이렇게 세명은 공항리무진에 엄청난 양의 짐을 싣고 씩씩하게 버스에 올랐다. 정류장에서 눈물짓는 아내 또한 아이들의 엄마를 뒤로하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체크인을 하는데 엄청난 양의 짐과 엄마는 없이 아들 둘과 떠나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직원은 기내에 들고 들어가야 될 가방들도 모두 수하물 처리를 해줬다, 자기 재량이라면서.
이제 거의 끝났다. 공항 검색대를 지나면 우리를 태울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는 게이트로 걸어가면 된다.
공항 안에서 바라보는 영종도의 하늘은 미세먼지와 황사로 누런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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