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이었다. 남들은 다들 자기 분야에서 자리 잡고 더 이상 새로운 것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욕망을 아직도 정산 못 차린 자들의 향락으로 치부하는데 그런 행위를 나는 하고 있었다. 심지어 학생회 대표까지 맡아서 오지랖 넓게 다 늦게 배운 도둑질을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행사를 진행할 수 있을까 며칠 동안 궁리한 끝에 '학생들의 잔치'로 만들어 보자고 그 얼개를 짰다. 학생들 구성원이 대부분이 학교를 다닌 지 한참 지난 나이가 꽤 있는 사람들이 다시 새롭게 관심 있는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공부하고자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어린 나이에 학교당국으로부터 객체의 역할로 존재했고 수동적인 존재였었다면 지금 이 자리는 정말 명실상부하게 배움의 주체가 되는 존재로서 말 그대로 다시 신입생의 입장으로 공부하러 참 잘 오셨다고 환영을 받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더구나 바로 한 시간 전에 있었던 학교에서 주최하는 공식 오리엔테이션이 있었기 때문에 학부에서까지 지루하고 재미없는 행사를 또 할 필요는 없었다. 임원들도 나의 취지에 동감을 하고 열심히 사전준비를 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진행상의 사소한 엇박자는 신입생들의 상기된 즐거움과 설렘으로 이해되었다. 신입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감동적인 자기소개는 지금의 이 자리가 결코 만만한 경로로 도착한 것이 아니었던 본인 자신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가슴에 와닿았다.
다음은 교수진 소개. 학과장이 나와서 학과소개와 신입생들에 대한 격려를 마치고 한마디 더 하는 게 놀랍게도 행사 진행 전체에 대한 사과였다. 내용인즉 좀 더 품위 있게 여러분들을 환영했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가벼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뭐가 불만이었는지. 본인이 이 학과에서 얼마나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지 알면서 행사 전체를 학생 위주로 만들어 버리고 본인은 그중 하나의 순서로 취급했다는 불만을 그런 식으로 표시한 것이다.
어이가 없고 기분은 나빴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여기에서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는 나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다. 우리가 이제 갓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그 교수보다 여러 방면에서 훌륭한 업적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많은데 군림하려 든다고? 학생회는 학생이 중심이라고. 내가 학생회 대표로 있을 때까지는 바라지 마라.
나의 임기가 끝나고 다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그 교수가 원하는 바대로 진행되었다. 학생회 대표는 그가 회사에서 입고 있을 법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칠판에는 교회 주보에서 봄직할 진행순서가 삭혀 있었다. 행사는 그 교수가 중심이 되었다. 대표는 그냥 사회자였다. 아이고 교수님, 저랑 일 년이 참 힘드셨겠어요. 나이도 두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아 뭐라 하기도 힘들었을 거고, 거기다 남자니까 더 껄끄러웠을 거고. 전 덤으로 교수사회의 진면목을 파악했답니다.
예의와 권위. 한 끗 차이로 보인다.
예의를 차려야 할 자리에 우리는 제일 먼저 그 자리에 입고 갈 복장부터 챙긴다. 면접을 보러 갈 자리에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교회에 갈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을지, 심지어 우리 아버지는 병원에 진료받으러 갈 때에도 정장에 넥타이를 하고 가셨다. 여기까지는 예의일까?
내가 제일 보기 껄끄러운 것 중 하나는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 정치인들의 복장이다. 청와대나(요즘은 용산이다.) 국회에서야 그들은 늘 정장을 입으니까 그렇다 치는데 군대를 방문해도 정장위에 군복을 걸치고, 야구 시구를 해도 셔츠에 넥타이를 하고 그 위에 유니폼을 입는다. 사고 현장을 가도 그 복장 위에 민방위복을 덧입는다. 이게 예의인가? 아님 어차피 사진 찍으러 왔으니 귀찮게 옷 갈아입지 말고 그냥 위에 걸치지 뭐. 이런 건가? 심지어 독거노인 배식봉사하는 척을 할 때도 넥타이는 절대 풀지 않고 가운에 앞치마를 걸친다. 이건 워 정말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꼴이다. 이건 예의인가 권위인가? 나 대통령이오, 나 장관이오, 나 국회의원이오. 이렇게 보인다.
캐나다에 와서 처음으로 병원에 갔을 때 무척 놀란 게 하나 있다. 의사가 있는 방에 문을 두드리고 쭈뼛거리면서 들어가는 한국과 달리 여기는 빈방으로 안내되어 앉아 있으면 한 십오 분 만에 의사가 그 방으로 찾아온다. 다른 방에서 진료를 마치고 여기로 오는 건데 왜 그러는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여튼 의사가 들어왔는데 순간 당황했다. 의사가 가운은커녕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순간 의사가 맞나 하는 의심도 들고 이 사람과 아픈 곳에 대해 이야기해도 돠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과연 의사가 맞았다. 아무 문제 없이 진료를 마쳤고 이제는 그런 의사들의 분위기에 익숙해져 어쩌다 한국인 의사를 만나면 오히려 좀 어색할 정도다. 그 의사는 여지없이 정장에 가운을 걸치고 있으니까.
캐나다에 와서 어학원과 컬리지를 다닐 때 강사들이 자신들을 티쳐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특히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티쳐라고 부른다면서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마치 야단치듯 하는 느낌이 들어서 싫던데(왜냐하면 우리는 이름 끝에 '야'나 '아'를 붙여서 부르니까 부드럽게 느껴지는데 그들은 이름만 딱 부르니까 왠지 기분이 나쁘다.) 그들은 아니었다. 이름을 부른다고 그들이 얕보이거나 교사로서 권위가 없어 보인다거나 하지 않는다. 이름이 피터건, 프랜시스건, 엘리자베스건, 제니건 그들이 매니저이고 수퍼바이저인건 확실하니까 정장에 넥타이를 하지 않아도 권위는 절로 느껴진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당연히 구별해야 하지만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외적 모양새를 걸치고 붙인다. 하지만 걸치고 붙인다고 권위가 생기는 건 결코 아니다. 더욱이 그가 어떤 신분이나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그의 겉모습이 아니라도 순식간에 사람들에 입에 오르내린다. 옛부터 내려온 유교적 권위주의가 이십일세기가 넘어가도록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것을 떨쳐버릴 만한 자존감이 높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존심은 세지만 자존감은 높지 않다는 분석이 있듯이 내가 혹시나 남들로부터 내 능력에 비해서 덜 인정되거나 또는 무시당할까 염려되어 더욱 겉모습을 치장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이런 사람 입네 하고 드러낼 필요가 있는 사람은 정치인, 경찰, 군인이면 족하고 드러내지 않아도 그의 권위가 속으로부터 드러나면 그게 더 멋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