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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May 12. 2020

혼자이고 싶지만 친구가 절실한 봄

인도의 봄 맞이 명절 : Happy Holi !

이목구비 중 절반을 마스크에 가린 채 보내야 하는 5월이지만 그래도 봄은 왔다.

초록이들을 베이스 컬러로 다채로운 색감들이 발걸음 닿는 곳 마다 흐드러진다. 오롯이 내 걸음 속도에 맞추어 걷고 있노라면 뺨을 스치고 지나가 머리칼을 살근 건드리는 앙증맞은 봄바람의 감촉이 퍽이나 달큰하다. 동행이 있을 때에는 그의 표정이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스쳐 지나가는 줄도 몰랐을 귀한 봄바람이다. 대중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물어 이어질 것이고 그러다 생각이 끊어지면 또 그런대로 그냥 내버려둔다. 아마도 거리의 소리들이 그 공백을 차지하거나 혹은 또 다른 생각이 빼꼼 고개를 디밀지도 모른다. 생각의 흐름과 시선 그리고 발걸음마저도 그저 나일 수 있는 시간을 잠시간 보내고 나면 리아의 엄마인 순간도, 남편의 아내인 모습도 한결 사람다워진다. 흡사 헐크 자매품 같은 모습의 나를 좀 띄엄띄엄 만날 수 있는 정도라고 해 두자. 흔히들 남자는 동굴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나 또한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던가 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성별이 남자 쪽에 가깝다는 이야기는 한사코 아니라고 힘 주어 강조하고 싶다.



나는 소속감과 안정감이 주는 구속을 선호하지만, 꽤나 자주 혼자이기를 희망한다.

자가당착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냥 그 모든 것이 나다.

인도에서의 일상을 갓 시작하던 때 그 곳에도 봄이 왔다. 어찌되었건 3월이 왔으니 말이다.

봄 보다는 여름에 가까운 날씨에 한국의 봄과는 이질적이지만, 푸릇푸릇한 식물들, 아파트에서 조경으로 심어둔 꽃들 정도는 즐길 수 있었다. 아직은 남편을 통해 알게 된 몇 안 되는 주재원 가정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고, 남편이 출근하면 퇴근해 올 때까지 아이와 딱 붙어 둘이서 시간을 보내며 언제나와 같이 나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다고 여겼다. 정말이지 잠시라도 혼자만의 충전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평상시의 나였더라면 분명히.



“저…아파트 로비에서 입주민들 대상으로 홀리 파티를 한다는 공고를 봤는데, 어떻게 하면 되는거예요? 혹시 그 쪽 집도 참여하시나요?”

화들짝 놀랐다.

엘리베이터에서 생판 처음 만난 인도사람에게 핑계를 만들어 말을 건네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저런 정보 따위야 사실 로비에 내려가 물어보거나, 전화 한통이면 알 수 있을 일이다. 명백한 수작질이다 어떻게든 말 한번 붙여보겠다는.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나한테도 이런 모습이 다 있다.



혼자 동굴 속으로 숨어들고 싶은 줄 알았더니, 실은 무척이나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며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아이와 하루 종일 하는 말이라고는 내가 할 말도 내가, 아이가 할 말도 내가 두개의 자아를 오가며  떠들되 정작 정말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건네지 못 하는 매일의 연속이었으니 저도 꽤나 답답할 법도 했다. 아무튼,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의 번호를 땄다. (그것도 처음에나 어려웠지 그 이후로 나는 아주, 코드가 맞을 법한 애 엄마만 보이면 일사천리로 좍좍 전화번호부터 따고 보는 능수능란한 외국인 엄마가 된다. 작업 멘트도 생겼다.) 아무래도 앞으로 최대한 오래 살고 봐야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던 순간이었다. 내가 몰랐던 내가 아직도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앞으로 미래에 나타나려 순번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또 다른 나들을 낙담시킨다는 것은 어쩐지 공정하지 않은 것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모자(母子; 엄마와 아들)는 당연하다는 듯 아빠 없이, 둘이서 손 맞잡고 위풍당당하게 아파트 홀리(Holi) 전야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홀리(Holi)는 힌두교 전통의 봄맞이 명절이자 축제로 보통 이틀간 진행된다. 나름 힌두교 3대 명절 중에 하나이며, 우리가 참석한 행사는 첫째 날에 해당하는 행사였다. 이 때가 되면,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온 몸에 알록이 달록이들을 서로 묻히고 뿌리거나 (학교들은 저마다 무독성 색소를 사용한다고 사전 공지와 홍보를 수차례 한다), 다량의 꽃을 서로 뿌리고 노는 행사를 한다. 마치 우리 나라 영/유아/초등 교육기관에서 어버이날에는 반드시 카네이션을 만들도록 시키는 것 처럼 말이다.





오후 6시 30분부터 시작한다고 해서, 정해진 장소(아파트 6층)에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내려갔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8, 90년대 자주 등장하던 용어인 '코리안 타임'이 슬그머니 떠오르는 순간이다.

인류의 의식적 성장과 계몽의 단계는 누가 정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유사한 모양이다.

30분쯤 지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 운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몹시 부끄러워졌다. 흰 티에 소시지 청바지 나부랭이에 화장기 없는 상투 머리 차림 따위로 내려 온 사람은 아무리 둘러봐도 나 뿐이다. 그런 상태로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무식했던 덕분이다. 의도치 않게 매우 용감한 사람이 되었다.



전통 의상을 입고 뿌려진 꽃을 바구니에 모으고 있는 아이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풀메이크업에 전통 복장을 입고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순간 황홀해지기까지 했다. 인도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아름답다.”를 연발하며 넋을 놓고 바라 보고 있던 때 모르는 인도 아저씨가 리아의 머리에 꽃잎을 뿌려주며 “Happy Holi, son !“이라며 지긋이 미소를 띄웠다. 생면부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의 위안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눈물이 찔끔날 뻔 한 위기를 잘 넘기며 활짝 띄운 미소와 함께 고맙다는 화답을 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홀리 이벤트를 위해  가지런히 준비 된 형형색색의 꽃잎들 (좌) / 잔디밭에 흩뿌려진 꽃잎의 잔해 (우)


 

모두가 가족과 함께인 것 처럼 보이던 그 날 저녁, 화려한 그 곳에서, 누가 봐도 외국인인 남편없는 그리고 아빠도 없는 리아와 나. 알게 모르게 위축되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 내렸던 걸까. 가능한 같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하겠다던 사랑하는 나의 남편은 역시나 예외없이 행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집에 돌아오지 못 했다. 해외 지사로 나가면 적당히 일하고 본사 눈에서 벗어나 적절히 편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둔한 나에게 시작부터 줄곧 바빠도 너무 바쁜 남편의 일상은 좀 가혹했다. 그러고보면, 언제 배려있는 본사가 있기는 했던가. 현지가 명절 기간이건 축제를 하건 회사는 현지의 일상을 개의치 않는다. 언제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 아주 짧은 찰나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건져 올리며 한 켠에 서 있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이런 위축된 감정과 모습을 리아까지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책임감이 재빨리 우위를 선점했다.



'그래, 아빠 없어도 우리 재밌게 좋은 시간 충분히 보낼 수 있잖아? 한국이 아닐 뿐인데 뭐 어때 !!' 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리아가 없다.

삽시간에 나는.

사색이 되었다.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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