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뉴욕에서 평생 글을 썼지만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한 가난한 작가가 있어요. 희귀한 고서적이나 절판된 시집을 꼭 구해서 읽고 싶지만 여윳돈이 없는 그녀는 대서양 건너 런던에 위치한 헌책방에 편지를 보내 책을 구합니다.
처음에는 책 목록과 물품 계산서처럼, 문서로 주고받던 편지에 각자의 사연이 보태지고, 서로 마음을 담은 선물까지 주고받으며 책 구매자와 판매자 이상의 친밀한 교류를 하게 됩니다. 20년간 꾸준히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책으로 낸 그녀는 가난한 무명작가에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르고 나중에는 영국 출판사의 초청으로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런던 땅을 밟게 됩니다. 수많은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요.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채링크로스 84번지>의 작가 헬렌 한프의 이야기입니다. 수중에 돈이 모이는 대로 기어이 읽고 싶은 책을 구하는 독서광 작가의 편지를 읽다 보면 책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 것 같아 괜히 반갑습니다. 무엇보다 작가와 서점 직원들이 점점 서로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갖게 되는 과정이 매력적인 책이에요.
당시 영국은 세계대전 이후 식료품을 배급받아야 할 정도로 사정이 안 좋았어요. 서점 직원들의 이런 상황을 알게 된 헬렌 한프는 본인도 바퀴벌레가 나오는 낡은 부엌에 사는 처지면서 서점 직원들에게 달걀, 통조림, 고기 등을 보내줍니다. 때론 나일론 양말 같은 생필품까지 살뜰히 챙겨 주고요. 그녀의 따스한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 직원들 또한 손수 만든 린넨 식탁보 등을 보내면서 기회가 된다면 영국에 놀러 오라고 하지요. 숙박은 책임져 준다면서요.
이 편지에서 내내 서로에게 반복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친절'입니다. 서로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면서 상대에게 친절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에 읽는 이의 마음에도 온기가 퍼져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고 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라는 문장을 읽는데 이런 게 출간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세상이 내게 베푼 호의와 친절에 감사하고 싶은데 달리 방법이 없을 때 저는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큰아이가 고속버스에서 심하게 멀미를 한 적이 있었어요. 하필 몸살기가 있던 날인데 깜빡 잊고 멀미약도 챙겨 먹지 않아 불안하던 차에 역시나 금요일 저녁 도로는 주차장 수준으로 심하게 막혔고, 아이는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고통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고 해요.
오도 가도 못하는 고속버스에서 혼자 그런 일을 겪는 게 처음이라 울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고 해요. 앞에 앉은 젊은 부부에게 도움을 청하자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 대신 운전기사에게 비닐과 물을 받아 갖다주고, 계속 괜찮냐고 물어보며 걱정해 주었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집에 도착한 아이가 말했어요.
"엄마, 진짜 눈물 날 정도로 고맙더라고. 알지도 못하는 나한테 그분들이 보여준 호의가. 너무 고마운데 내릴 때 정신이 없어서 '고맙습니다'란 말을 두 번밖에 못 했어."
그때 아이에게 해준 말이 있어요. 괜찮다고. 그분들도 그 마음 알 거라고.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상대가 베풀어준 친절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큰 힘이 되지요. 저도 고등학교 3학년 때, 대입 시험을 며칠 앞두고 모르는 중년의 아저씨가 수험생이냐고 물어보고 그렇다고 했더니, "수험생 파이팅입니다! 잘할 수 있을 거예요!" 한 마디 건네준 게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거든요. 각박하다 어쩐다 그래도 세상이 살 만하다 느꼈던 때를 떠올려 보면 무슨 로또에 당첨된다던가 하는, 큰 사건이 필요하지는 않았어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작은 친절만으로 충분했지요. 초보엄마가 우는 아기를 달래지 못해 쩔쩔 매고 있을 때 옆에서 같이 달래주던 할머니들, 아픈 아이가 택시에 토해서 너무 죄송하고 당황스러웠는데 아이는 괜찮냐고 걱정해 주시던 택시 기사님, 큰아이 대입 실기시험 볼 때 신분증을 분실해서 정말 머리가 하얗게 되었는데, 내 일처럼 걱정해 주며 생기부를 출력해서 챙겨주던 한 초등학교 행정실 직원 분들. 어려움이 닥친 순간마다 햇살처럼 드리워진 한 조각의 친절 덕에 그 시간을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아이에게 덧붙여 말했어요.
"네가 친절을 받은 것처럼 너도 언젠가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 돼. 누군가 곤란하고 힘들어 보일 때 도와주면 돼. 오늘 일을 기억하면서."
독자들의 리뷰나 댓글은 언제나 감사하고, 감동적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댓글이 있었어요. 장애인과 장애아 인권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실제로 장애아를 키우는 한 어머니가 "고군분투하는 매일에 큰 위로가 되는 글이었다"라고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무명의 작가가 쓴 글 한 편이 무슨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까, 조금은 마음이 처질 때가 있어요.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원고를 왜 매일 쓰고 있는 걸까, 회의가 들 때도 있고요.
그런데 이분의 댓글이 저에게는 해답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내 글이 누군가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줄여 줄 수 있다면,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그 순간 마음속에 작은 온기라도 지필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세상에서 받은 친절을 되갚는 방법이라면, 당장의 성과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나의 원고 쓰기에 정진해야 하지 않을까. 저의 출간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