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을 할 때 수강생들이 무척 재미있어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제시해 주고 그걸 글로 표현하는 거예요. 자기 나름의 문체 스타일을 살려서요. 다음과 같은 수업 예가 있습니다.
<가슴 떨리는 나의 결혼식 날. 그런데 결혼식장에서 예비 신랑이 사실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결혼식이 중단되었다. 일행과 집에 돌아온 이후 혼자 내 방에 들어선 나. 이 순간 나의 독백은? 각자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써보세요.>
수업 시간에 이렇게 제시문을 주면 다들 상상만으로 눈앞이 하얘진다, 어쩐다 웅성웅성하면서도 금방 조용히 집중해서 쓰십니다. 사실 이 상황은 샬롯 브론테의 <제인에어>에서 가져온 거예요. 수강생들에게 <제인에어>에서 가져온 아래 문단을 보여주면 모두들 감탄한답니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반쯤 열린 문간에 서 있다가 목사가 돌아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모두가 가버린 뒤에 나는 내 방에 처박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에 빗장을 질러 놓았다.
아직도 평정을 잃지 않고 있었던 나는 울기 위해서도 아니고, 애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기계적으로 결혼 의상을 벗어 놓고 이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어제 입었던 나시 옷으로 바꿔 입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맥이 빠지고 몹시 피곤했다. 나는 테이블에 팔을 괴고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중략)
나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내 방 안에 있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는 나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나를 때리고 상처 내고 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제의 제인 에어는 어디로 갔을까?"
글을 쓰다 보면 독서가 더 즐거워집니다.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독서가 아니라, 나라면 이 부분을 어떻게 쓸, 나라면 이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하게 할까, 자꾸 생각하면서 읽게 되거든요. 수강생들이 <제인에어>의 결혼식 상황을 상상해 글을 써 본 다음, 실제 작품의 이 대목을 읽으면 '고전이 괜히 고전이 아니다'는 걸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예전에 다 읽었던 책이라고 생각해 잊고 있었는데 다시 꼼꼼히 읽고 싶다는 분도 계셨어요.
에세이 수업에서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해 글을 써보는 훈련을 하는 것은 행동과 대사, 공간적 배경이 적절하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장르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쓸 때도 서술자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인물의 대사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잖아요. 작중 인물의 마음, 감정, 생각, 또는 인물 간 갈등과 해결 등을 두고 나열식으로 설명하면 소설이 아니고 신문 기사나 보고문이 되겠지요.
소설의 이런 속성을 잘 이해하는 독자라면 에세이도 보다 잘 쓸 수 있습니다. 에세이는 허구가 아닌 사실에 기반하며, 작중 인물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하는 점이 소설과 다르지만, 독자에게 상황을 보여주고 필자의 감정선을 따라오게 한다는 점에서는 소설과 상당 부분 겹치거든요.
샬롯 브론테가 <제인에어>를 썼던 나이는 30대 중반에 불과했지만, 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는 삶에 대한 통찰력은 너무 탁월하지요. 당시는 평균 수명이 짧아서 생애 주기가 지금과 달랐다는 걸 감안해도 말입니다. 19세기 여성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던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이토록 주체적이고 열정적인 주인공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아마 자기 자신은 물론 사람과 세상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고 사색했던 작가의 역량 덕분일 것입니다.
우리가 문장 쓰기 훈련을 하는 이유는 기교에 가득 찬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아닐 거예요. 저는 멋 부린 문장보다는 차라리 밋밋한 문장이 낫다고 가르치는 쪽입니다. 문체는 각자 취향과 선호에 따라 달라지는 영역이니 문장은 자신의 개성대로 스타일을 구현하는 게 맞는데요, 처음부터 문장을 꾸미기 시작하면 나중에 담백하게 돌아오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제대로 잘 썼는지 스스로 확인이 안 될 때는 위와 같은 예제를 통해 비교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감히 내가 시대를 뛰어넘어 고전으로 남은 작품과 뭘 견주기 위해서라기보다, 이렇게 실전으로 부딪혔을 때 그 배움의 파동이 더 크고 강하게 울리니까요.